[란코프] 1.21 사태

란코프 ∙ 한국 국민대 교수
2020-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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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1일이 어떤 날인지 아시나요? 청취자 여러분도 잘 모르고 오늘날 남한에서도 거의 잊혀진 날짜입니다. 그러나 의미가 있는 날입니다. 1968년 1월 21일 조선인민군 특수부대가 서울시내까지 들어와서 대한민국 대통령 관저인 청와대를 거의 공격할 뻔했습니다. 북한 특수부대는 마지막 순간에 남한 경찰과 군대에 의해 저지 되었는데 이때 서울 시내에서 전투까지 벌어졌습니다.

물론 당시 북한 언론은 이것이 북한 특수부대의 작전이 아니라 남한 무장 유격대의 공작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1972년에 남한 특사와 만난 김일성은 그 사건에 대해 인정했습니다.

이 사건은 남북간의 유일한 무력 충돌은 아닙니다. 비슷한 시기 북한 특수부대는 남한의 동해안에 상륙했고 몇몇 마을을 해방지역이라 선포하고 남한군대와 전투를 벌였습니다. 남북한 역사를 보면 1.21사태가 마지막으로 북한이 직접 시도한 혁명 사건입니다. 북한은 그 후에도 종종 혁명 운운하긴 했지만 대규모 작전을 한 적은 없습니다.

당시 1.21사태가 벌어진 이유가 있습니다. 멀고 먼 나라에서 생긴 일 때문입니다. 바로 베트남입니다. 당시 김일성을 비롯한 북한 지도부는 베트남에서 벌어진 일에 관심이 참 많았습니다.

베트남과 한반도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분단국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북베트남 공산당은 소련과 중국의 압력에도 굴복하지 않고 계속해서 남베트남에서 벌어지는 혁명운동을 열심히 도와주고 있었습니다. 북베트남 병사들은 비밀리에 남부로 가서 그곳에서 무장 유격대 활동의 핵심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유격대 활동 결과 1960년대 말 북베트남은 큰 성공을 거뒀습니다. 이어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북베트남은 1975년 무력으로 남베트남을 무너뜨리고 통일에 성공했습니다.

그래서 상황이 비슷했던 한반도에서 북한 지도자들은 베트남 공산당을 모방한 것입니다. 1960년대 말 조선인민군은 38선에서 사격사건을 많이 일으키고 긴장감을 고조시키려 노력했습니다.

북한 공작원들은 남한사회에서 진보파로 알려진 사람들을 찾아가 공작금을 제공했고 같이 일할 것을 제안했습니다. 또 베트남공산당의 성공적인 전술을 모방해서 남조선 산간 지역에서 해방지구를 만들려고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무장 공작선도 많이 보냈습니다. 그러나 베트남과 달리 한반도에서는 실패로 끝났습니다. 왜 그럴까요?

북한 지도자들이 중요한 점을 간과했기 때문입니다. 첫째, 지형이 아주 다릅니다. 베트남엔 밀림이 많지만 한반도는 산악지역이 많아서 유격대가 숨을 곳이 적습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남한의 국내 정책입니다. 남베트남의 부정부패가 심하고 능력이 없던 정권은 사실상 나라를 망하게 했습니다. 반대로 1960년대 말 들어와 남한은 세계역사에서 전례없는 빠른 경제성장을 시작했습니다. 당연히 남한 인민들은 정부를 반대할 이유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1968년 1월 21일 청와대 근처에서 사살된 북한 특수부대는 아무 결과를 만들지 못했던 것입니다. 자연스럽게 북한 지도부의 남한 혁명은 불가능한 꿈이 되어 버렸습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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