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중국 속 북한인, 비극의 현장을 가다’ ⑤ "오마니, 다시는 헤어지지 말아요"

자유아시아방송(RFA) 기획특집방송 ‘ 중국속 북한인, 비극의 현장을 가다’ 오늘은 다섯 번째 순서로 12년전 헤어진 어머니를 찾아 두만강을 건넌 한 10대 소녀의 얘기 ‘ 오마니, 다시는 헤어지지 말아요’ 편을 보내 드립니다.
중국-정영 xallsl@rfa.org
2009-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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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단둥 시내.
중국 단둥 시내.
RFA PHOTO/박성우
12년 전 헤어진 어머니를 찾아 두만강을 건너온 한 10대 소녀가 매화구시의 한 농촌마을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중국 심양에 도착한 지 사흘째 되던 날이었습니다. 해질 무렵, 한 탈북자 지원가의 소개로 그들 모녀가 사는 농촌마을로 향했습니다.

이들 모녀가 사는 집은 중국 정부가 노동자들을 대거 수용하기 위해 지은 다세대 주택 한 끝에 있는 셋집이었습니다.

동네 중국 사람들에게 탈북자라는 것을 숨기고 사는 어머니는 중국말을 모르는 정미에게 절대로 집 밖으로 나오지 말라고 일러둔 상태였습니다. 어스레한 방안에 들어서니 한 10대의 소녀가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습니다. 낯선 사람이 방안에 들어서자 이 소녀는 경계의 눈빛을 보입니다.

어머니가 한국에서 온 손님이라고 딸애에게 소개하자, 그는 불안을 감추지 못합니다. 어머니는 기자에게 딸애가 두만강을 건넌지 한 달밖에 안 됐기 때문에 외부인을 두려워하고 있다고 귀띔해줍니다.

기자는 소녀에게 북한에서의 삶을 말해 달라고 했습니다. 얼굴을 붉히며 어머니를 보던 소녀는 어머니의 재촉을 받고서야 인터뷰에 응했습니다.

정영: 이름이 뭐예요?

정미 : 정미(가명)요.

정영: 학교는 다녔어요?

정미: 할머니와 같이 있다 보니 바빠서(어려워서) 못 다녔어요.

정영: 그러면 학교가 멀었어요?

정미: 학교요, 그저 20분 내려가면 학교예요.


어머니의 얼굴을 익히기도 전에 헤어진 정미의 유년시절 이야기는 지금으로부터 12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정미가 3살 나던 해, 산에 올라가 나무를 해다 팔며 간간이 생계를 이어가던 어머니가 갑자기 사라지면서 정미는 외할머니와 함께 함경북도 명천군의 고향마을에서 살았습니다.

‘고난의 행군’으로 불리는 90년대 중반 먹을 것이 없어 아버지마저 일찍이 잃은 정미에게 할머니는 유일한 기둥이었습니다. 그러나 정미는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어머니 생각에 눈물 속에 살았습니다.

정영: 어머니 없어서 울어본 적 있어요?

정미: 예, 울 때 많지요. 아플 때 제일 많이 눈물이 나요. 아플 때 제일 많이 생각나는 게 엄마이지요.

정영: 국가에서 배급이랑 줘요?

정미 : 우리 못 받았어요. 배급을 타자면 정지를 붙여야 하는데 우리 아버지가 내 정지까지 하고 갔기 때문에 못 받았어요.


그러던 정미가 8살 되던 해, 유일하게 돌봐주던 외할머니마저 세상을 떠나면서 정미는 의지할 데 없는 고아로 남았습니다. 이때부터 향미는 장마당 여기저기를 헤매면서 ‘꽃제비’생활을 하게 됩니다. 지나가다 동료 꽃제비들이 쥐어주는 빵 한 조각으로 끼니를 때우고, 잠자리는 다리 밑이나 역전 대합실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꽃제비들을 모집해두는 ‘9.27상무’라는 곳에 수용된 정미는 어머니가 데리러 올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습니다.

정영: 엄마가 없는 애들을 어떻게 키우나요.

정미: 엄마 없는 아이들은 부모 없다면 꽃제비가 돼요. 말을 들어보고 우리 엄마 없다고 하면 친척들이 키워줘요.


친척이 있는 애들은 그나마 수용소에서 내보내 주지만 의지 가지 할 데 없는 애들은 그곳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중국에 있는 어머니가 보낸 사람이 정미를 찾아왔습니다.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중국에서 몇 년 동안 번 돈을 털어 딸을 데려오기로 결심했던 것입니다.

정영: 어머니가 중국에 있다는 소식은 들었어요?

정미: 원래 몰랐댔어요. 중국에 있다는 미련이야 가지고 있었지요. 그런데 소식이 없으니까요.

정영: (어머니에게) 몇 년 동안 소식이 없었습니까?

정화: 3년 전부터 내가 이 애를 데려오려고 연락했어요. 그때 조선에는 휴대폰이 없었잖아요. 그래서 찾으려야 찾을 수 없었고, 그래서 난 다 죽은 줄 알았어요. 내가 돈을 못 부쳐 주었는데.. 늙은이에게 맡겨놓았는데 어떻게 살아있겠는가고 생각했는데 이만큼 커오니까 나야 고맙지요. 어머니가 딸을 데리고 키웠는데, 엄마 연세 있는 것도 있고 그래서 딸이 굶어 죽는 것 같고 그래서 무조건 데려왔어요.

중국에서 딸애를 데려오려는 어머니의 노력과 어머니를 그리는 정미 사이에 연락은 잘 닿지 않았습니다.

정영: 그럼 다 사기 맞았습니까?

정화: 주인집에서 기다리다가 다 썼어요. 애를 데리러 나갔다가 두만강에 나가 기다렸어요. 데려온다 하면서 조선 쪽에서 검사 심해져서 사람 하나 잘못 넘기다가 걸리면 죽는대요. 두만강 한번 넘기는데 드는 돈은 1만 2천 원이라고 해도 다 못 온대요.


그동안 어머니는 정미를 데려오려고 세 번이나 시도하며 중국에서 벌었던 돈을 모두 다 썼습니다.

정영: 돈은 얼마나 들었습니까?

정화: 저는 과일도 팔고 식당을 하면서 번 돈을 들여보냈는데, 몇 번 허탕을 쳤습니다. 세 번 나갔댔어요. 처음에 5천8백 원을 쥐고 나가고, 두 번째 나갈 때 8천 원 쥐고 두 번째 7천 원 들었어요. 그 사람들이 데려온다고 해서 연변에 나갔는데 길에다 다 널어놨어요. 조선 쪽에 주는 것만 중국 돈 1만 4천 원이고, 딸에게 옷을 사주고, 먹여주고 해서 2천 원가량 들었습니다. 그래서 1만 6천 원 들었습니다. 그러다가 그 돈을 다 물어줘야 합니다. 한족한테 주고 데려왔어요.


어머니가 이렇게 시도하던 끝에 정미를 데리러 간 사람이 ‘꽃제비 수용소’에 있는 정미를 찾아내는 데 성공하게 됩니다.

정영: 그러면 어떤 사람이 찾아와서 가자고 하던가요?

정미: 나를 데려온 사람은 여자예요. 엄마 보고 싶지 않은 가고 해서 좋아서 따라왔어요.

정영: 두만강을 넘어가자고 했을 때 어떤 생각을 했어요?

정미: 처음에는 속이 떨렸는데 두만강을 넘어서 한 30분 걸어왔어요. 그저 엄마 빨리 오고 싶었어요.

정영: 국경을 넘을 때 반역자가 된다는 생각을 안 했어요?

정미: 글쎄 한쪽으로 그런 생각을 하긴 했지요.


이렇게 어머니와 상봉한 기쁨도 잠시. 12년 동안 헤어졌던 어머니 곁으로 오긴 했지만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합니다.

정영: 앞으로 무엇을 하고 싶어요?

정미: 글쎄요. 나 아직 나이가 어려서 생각을 못했어요. 내 나라 땅도 아니고 남의 나라 땅이니까 그것까지 못해봤어요.

천신만고 끝에 두만강을 건너온 정미도 이제 어머니와 똑같은 숨어 살아야 하는 탈북자가 되었습니다. 어머니와 함께 중국에서 살자니 국적이 없고, 한국으로 가자니 앓는 어머니가 마음에 걸립니다.

정화: 저 애도 그것을 걱정하는데 그래서 여기서 나이가 좀 있은 다음에 호구 올려주는데 가라고 말합니다. 호구가 있어야지 권리가 있지 안 된다. 한국에 가겠다고 하니까, 신경을 안 씁니다.

한국에 가기를 원하는 정미가 한국 텔레비전을 보면서 남한 말을 배우려고 무진 애를 쓰지만, 갓 수술을 마친 어머니가 긴 여행을 하기는 어렵습니다. 또 머나먼 동남아까지 나가자면 비용도 적지 않습니다.

넓은 중국 대륙에서 오도가도 못하는 두 모녀, 무엇이 이들 모녀를 이렇게 만들었는지 그들은 잘 모릅니다. 아니 굶어 죽지 않고 서로를 만나야 한다는 애절한 마음에 그런 생각은 아예 할 겨를도 없었습니다.

국민을 먹여 살리지 못하는 잘못된 북한 정권이 이 땅에 있는 한, 그리고 가장 최소한의 인권도 외면하는 중국이 태도를 바꾸지 않는 한 이들 모녀와 같은 비극은 끝없이 이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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