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지 않는 6월의 눈물

워싱턴-이진서 leej@rfa.org
2019-06-24
이메일
댓글
Share
인쇄
지난 2015년 대전 유성구 국립대전현충원에서 열린 국군포로 손동식 이등중사 안장식에서 영현봉송병이 영정과 영현을 안고 묘역으로 향하고 있다. 고인은 6·25 전쟁 때 국군포로로 끌려가 1984년 북한에서 숨졌다. 손씨의 딸인 명화 씨는 2005년 탈북한 뒤 아버지 유해의 국내 송환을 위해 노력하다 2013년 가까스로 유해를 찾아왔다.
지난 2015년 대전 유성구 국립대전현충원에서 열린 국군포로 손동식 이등중사 안장식에서 영현봉송병이 영정과 영현을 안고 묘역으로 향하고 있다. 고인은 6·25 전쟁 때 국군포로로 끌려가 1984년 북한에서 숨졌다. 손씨의 딸인 명화 씨는 2005년 탈북한 뒤 아버지 유해의 국내 송환을 위해 노력하다 2013년 가까스로 유해를 찾아왔다.
/연합뉴스

올해로 6.25전쟁이 발발한지  69년이 됐습니다. 매년 6월달이 되면 전쟁으로 인한 후유증으로 아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선 가족을 잃은 사람들 그리고 분단 상태에서 이산가족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오늘은 탈북해 남한에 사는 국군포로 자녀의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손명화: 엄청 바쁩니다. 6월달이 지나면 또 6.25가 잊혀지지 않습니까. 요즘 6.28국군포로가족회가 주최하는 행사준비를 해야하고 ...

지난 2005년 탈북한 손명화 씨의 아버지는 북한에 억류됐다 사망한 국군포로입니다. 명화 씨의 아버지  고 손동식 씨는 죽기전 너만이라도 꼭 남한으로 가라. 내 유해도 고향 땅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고 고인의 유언은 60년 만인 지난 20013년에 이뤄졌습니다.

손명화: 아버지가 25살에 전쟁에 나갔다가 마지막 포로가 된 29명 조입니다. 우리 아버지는 마지막 국군포로가 된 사람이기 때문에 다른 국군포로보다 수용소 생활이 짧습니다. 6.25전쟁에 한 달을  참가했다가 포로가 된 사람들은 3년이란 기간, 휴전협정을 이룰때까지 포로수용소 생활을 해야 하지만  저희 아버지는 전쟁을 3년 하고 정전협전 두 달을 앞두고 포로가 됐기 때문에 다른 국군포로들은 그래도 북한에서 전깃불이라도 봤는데 우리 아버지는 악질적으로 인민군을 많이 죽였다는 이유로 죽는 날까지 전깃불을 못 본 사람입니다.

손명화  씨가 국립대전현충원에 있는 아버지 묘를 찾아 참배하고 있다.
손명화 씨가 국립대전현충원에 있는 아버지 묘를 찾아 참배하고 있다. /손명화 씨 제공

손 씨는 북한에 있는 친인척들의 도움으로 부친의 유골을 중국으로 옮긴 후 남한에 송환하는데 성공합니다. 전쟁 당시 부친은 육군 9사단 소속 전투병이었습니다. 그리고 1953년 4월 포로가 돼서 1984년 사망할 대까지 함경북도 아오지 탄광에서 강제노동을 해야 했습니다.

손명화: 돌아가시기 10일 전에 거동이 불편해서 움직일 수 없을 때 이불에 둘둘 말아서 소달구지에 아버지를 실어서 집에 모셔서 10일간 전깃불을 보고 아버지는 돌아가셨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저는 밤거리에 전깃불이 반짝반짝 하면 그것이 아버지에게 너무나 한이 돼서 6.25가 되면 저는 밤잠을 이룰 수 없습니다.

현재 국군포로 손동식 이등 중사의 유해는 국립 대전 현충원에 안장됐습니다. 그리고 그의 딸 손명화 씨는 6월이면 아버지가 더욱 그립습니다.

손명화: 우리가 이번 6월4일 문 대통령이 청와대로 보훈단체 200명을 초청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보훈처에 왜 우리 단체는 초청을 안하는가 했더니 우리 단체는 국가 유공자가 아니랍니다. 그리고 보훈단체가 아니기 때문에 초청할 수 없다고 해서 바로 다음날인 5월29일 기자회견을 했습니다. 북한에서 국군포로는 어떤 사람이고 나라를 위해 총을 메고 전장으로 나갔다가 자식들마저 멸시와 천대를 받아 사람취급도 못 받았는데 한국에 아버지 고향이라고 왔는데 왜 우리는 끼워주지 않냐? 그랬더니 6.6일 현충일 행사에는 보훈처가 명부를 보내라고 초청장을 다 보내서 참석했습니다. 그리고 6.25일 장충체육관에서 행사를 하는데 초청장을 보내주더라고요.

손 씨가 국군포로였던 아버지에게 전해들은 아버지 과거에 대한 이야기는 많지 않습니다. 그가 기억하는 전쟁에 대한 이야기는 손꼽을 정도입니다.

손명화: 저희 아버지는 미 연합군에 복무해서 전쟁이 많이 참여했는데 처음에는 소통이 잘 안됐는데 나중에는 미국 사람들이 따뜻하고 인정이 많았다고 했어요. 자기들이 아버지에게 군화도 자기 것을 신으라고 주고 전쟁 중에 미국 사람들의 통조림을 많이 먹었다 이런 말을 했고 아버지가 하는 말이

전투 이야기는 낙동강 전투가 너무 치열했는데 그 전투에서 자기 동생하고 헤어졌는데 낙동강이 피바다가 됐다는 겁니다. 물이 완전히 뻘겋게 흘러 갔데요. 낙동강에 군대들이 막 쓰러져 있을 때 아버지는 눈에서 불꽃이 튀더래요.

2남 4녀 중 맏딸인 손 씨. 유난히 아버지는 명화 씨를 사랑했고 가끔씩 속에 뭍어 두었던 말을 꺼내곤 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아버지의 얘기를 들을 때마다 아버지를 이해하기 보다는 원망의 마음이 컷습니다.

손명화: 아버지가 동생들 한테는 입도 뻥끗하지말라 그리고 오빠들하고 얘기 안하고 나한테만 엄청 많이 얘기를 했고 했지만 아버지가 국군이라고 주민대장에 43호라고 돼있는 것을 봤을 때 저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어요. 내가 사회 나가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잖아요. 그때 제가 아버지 한테 아버지 왜 나를 이세상에 태어나게 해서 어떻게 살아 가겠는가 차라리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어야 하지 않는가 아버지는 왜 자식을 이렇게 많이 낳았는가 물었더니 아버지가 하는 말이 나는 이 땅에서 독신이기 때문에 외롭고 너무 고통스러워서 자식이라도 많았으면 좋겠다 그것이 간절해서 자식을 많이 낳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말을 듣고 저는 아버지를 너무 원망했습니다.

기자: 43호 대상자라는 사실은 언제 알았습니까?

손명화: 제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2년 있다가 주민 대장을 보니까 왼쪽에 퍼런 잉크로 43호라고 찍혀있더라고요. 제가 20살에 알았죠.

손명화 씨는 탈북해 남한에 간 이후로 국군포로가족회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손명화: 제가 국군포로 일을 8년 하고 있는데 국군포로가 살아있다면 10년전에 500여명이었는데 지금은 50명도 없습니다. 국경지역의 국군포로 자녀들은 지금도 넘어 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제가 전화 통화도 하고 얘길 해보면 고향이 온성탄광, 무산광산 등 국군포로가 살아있다면 10명도 되나마나 하겠습니다. 살아있다면 모두 90세 이상인데 북한은 먹는 것이 없는데 그나이까지 살겠습니까?

기자: 지금 남한에는 몇분이나 생존해 계십니까?

손명화: 80명이 오셨는데 지금 26명이 살아계십니다. 최고 고령이 1923년생으로 97세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올해 6.25 전쟁 69돌 행사때도 10여분의 귀환 국군포로 분들이 참석했다고 손 씨는 말합니다. 그리고 그 탈북한 자녀들도 매년 모임을 갖고 있는데요. 손 씨는 아직 북한에 사는 국군포로 자녀들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다면서 자신이 탈북할 당시나 지금이나 상황이 나아진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손명화: 우리가 43호라고 하면 인민반장이 우선 감시를 하고 그리고 인민반에 있는 직맹위원장, 보위부 밀정이 각 보위부에 2명씩 있는데 늘 집에 누가 드나드나 어쩌나 늘상 감시를 하죠. 딱 자기 지방에서 한발짝도 못가게 감시를 한데요. 어디를 가는지 살표보고는 보고를 하고 하니까 정말 사는 것이 사는 것같지 않데요.

토대와 상관없이 자신의 능력에 따라 원하는 일을 할 수 있고 누구로부터도 감시받지 않는 자유를 얻었지만 특히 6월이면 손명화 씨는 가슴이 답답해 진다고 했습니다.

손명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고 감시를 안받고요. 북한에서 아버지가 국군포로인 죄로 연좌제로 아버지가 탄광에서 살아서 우리도 탄광에 살고 아버지가 20대에 남한에다 부모형제를 남겨두고 이산가족이 됐는데 우리도 북한에다 또 아버지 대를 이어서 이산가족이 됐잖아요. 형제 부모 엄마를 남겨놓고 아버지 고향에 왔잖아요. 먹고 살고 숨쉬는 공간은 물론 자유롭지만 너무너무 슬픕니다. 사실은….

궁금증을 풀어드립니다. 오늘은 남한에 간 국군포로 자녀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 입니다.

원본 사이트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