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군포로는 말한다

워싱턴-이진서 leej@rfa.org
2018-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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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포로 귀환자와 그 자녀들이 18일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앞에서 시위를 하고 있다.
국군포로 귀환자와 그 자녀들이 18일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앞에서 시위를 하고 있다.
사진-국군포로 자녀 손명화 씨 제공

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궁금증을 풀어드립니다.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한국 역사박물관에서 전쟁포로, 평화를 말하다란 주제로 행사를 열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1950년 있었던 6.25전쟁과 현재 남북의 분단상황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갖고 있는데요.  지난 18일에는 국군포로 귀환자와 그 자녀들이 행사장을 찾아 기자회견을 했습니다. 어떤 내용인지 국군포로 자녀인 손명화 씨를 통해 자세한 내용 알아봅니다.

기자: 오늘 행사가 있는었는데요 .어떤 모임이었습니까?

손명화: 대한민국 역사박물관에 전쟁포로는 평화를 말한다는 주제로 2018년 12월 5일부터 2019년 1월 17일까지 전시회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국군포로 문제를 왜곡했습니다. 국군포로에 대해 어떻게 썼는가 하면 1만3,348명만 포로가 되고 나머지 포로는 유엔군, 중공군 포로고 나머지 국군포로는  모국으로 돌려보냈다고 거기에 전시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7일 달려가서 이 부분을 조목조목 반박하고 이부분을 내리라고 했습니다. 전쟁포로 생활을 말한다고 하면서 국군포로는 평생 북한에서 노예로 짐승처럼 살았는데 국군포로는 언급은 없고 인민군 포로에 대한 전시회를 하는가? 그러면 전쟁포로라고 하지 말아야 하지 않는가? 그랬습니다.

기자: 손명화 씨는 국군포로 자녀인데 아직 북한에는 미송환 국군포로가 있다는 건가요?

손명화: 아직도 돌아오지 못한 국군포로가 10만 명이나 됩니다. 그런데 10년전에 560명정도가 생존해 있다고 했는데 이제는 시간이 지났으니까 얼마나 생존해 계신지 알 수 없습니다. 오늘 행사에 나오신 국군포로 귀환자 중 86세가 나이가 제일 어리고 96세가 제일 나이가 많았습니다. 이 나이에 북한에서 살 수 있겠습니까? 이제는 북한에 살아있는 국군포로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아버지가 무산광산에 있을 때도 국군포로가 1,200명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오신 유영복 어르신이 말하길 검덕 광산에도 600명 그 밑에도 400명 정도로 거기도 1천명의 국군포로가 있다고 하는데 어떻게 대한민국 역사박물관에서 그런 전시회를 합니다. 포로를 다 모국으로 보냈다고 하는데 이것은 왜곡이지 않습니까?

기자: 북한에서는 원해서 북한에 귀화한 사람이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한국 정부는 어떻게 보고 있습니까?

손명화: 이제는 한국정부가 북한에 국군포로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1993년에 조창호 중위가 탈북해 한국에 와서 내가 국군포로다 군번이 있다고 해서 인정받았습니다. 하지만 유엔에서 8만 3천명 추정했고 한국 국방부는 7만 8천명으로 군사편찬 연구소에서도 입증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역사박물관 행사 주최측에서 거제도 수용소에 대한 것을 홍보하기 위해 행사를 했다는 겁니다. 전쟁포로 문제와 국군포로 문제가 상충되는 부분이 있어 조율 중에 있습니다.

기자: 손 대표는 북한에서 어떤 생활을 했는지 소개를 해주시죠.

손명화: 우리 북한에서는 아버지가 국군포로여서43호 딱지가 붙어서 연좌제로 오빠들은 군대도 못갔고 여자들도 학교에서 공부를 아무리 잘해도 우리는 출신성분이 나빠 대학에 갈 수 없습니다. 아버지가 탄광에서 일하면  우리도 탄광에 가야하고 3세대까지 43호 가족 딱지를 평생 달고 살았습니다.

기자: 언제 탈북해서 남한에 정착했나요?

국군포로 자녀인 손명화 씨(오른쪽 두번째)와 귀환자들.
국군포로 자녀인 손명화 씨(오른쪽 두번째)와 귀환자들. 사진 제공: 손명화 씨

손명화: 제가 45살에 한국에 왔습니다. 결혼했는데 아버지 출신성분이 국군포로니까 신랑이 장교인데 6개월만에 옷을 벗겼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신랑은 타락해서 자살해 죽고 그래서 북한에서 더는 살 수 없어서 아들 둘을 데리고 남한까지 몸부림치면서 왔습니다. 내가 자식을 낳아도 내 자식도 43호란 말입니다. 그 사회는 국군포로 자식은 행복이란 꿈을 꿀수도 없고 생각조차 못합니다. 삶을 위해 자유를 위해 2005년 12월 탈북했습니다.

기자: 아무래도 감시가 심했을 텐데 탈북하는데는 문제가 없었네요?

손명화: 저는 괴뢰군 자식이고 43호이기 때문에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북한에서는 출신성분이 나쁘지만 머리가 빨리 돌면 총알받이로 써먹는다는 말입니다. 저는 당시 보위사령부 518소 마약을 재배하는 곳에서 4년정도 일하다가 여기로 말하면 남산지하실인데 북한에서 그런 감옥에서 10개월을 있었습니다. 거기서 매맞고 고문받고 다 죽게 돼서 들것에 들려서 나와서는 건강을 조금 회복하고 나한테 관심이 조금 꺼졌을 때 작은 아들이 18살이었는데 아들 부축을 받으면서 두만강을 넘었습니다.

기자: 한편의 영화 같은 이야기인데 아버지가 국군포로였기 때문에 남한에 갔을 때 일반 탈북자와 다른 어떤 특혜를 받았습니까?

손명화: 아직까지는 하나도 없습니다. 한국에 와서 인천공항에 내렸을 때 어머어마한 전깃불이 번쩍번쩍 했는데 그것을 보고 제가 주저 앉았습니다. 이렇게 전기가 남아도는 남한에서 어떻게 아버지를 버렸냐? 아버지는 죽을 때까지 전깃불을 못보고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아버지를 원망했던 것이 생각나서 주저앉았습니다. 아버지가 눈을 감기 전에 난 국군포로다 해서 내가 국정원에 가서 말했어요.  아버지는 정전되기 전에 두 달전 포로가 됐는데 아버지가 악질적인 포로다 해서 혹독하게 대했습니다.  인민군을 많이 죽였다는 거죠. 3년동안 전쟁에 참가해서 많이 죽였다는 거죠. 그래서 아버지가   무산광산에서 일하다 51살에 폐암에 걸리니까 탄광 지하막장에서 일하는 갱도 원목을  하는 산전막에서 일했습니다. 내가 아버지 산전막에 가서 같이 자고 나면 콧구멍이 새까맣게 되고 했는데 돌아가시기 전 10흘 전에 내려와서 아침에 돌아가셨습니다.

기자: 국군포로 당사자는 연세가 많으셔서 생사를 알수 없지만 국군포로 자녀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해주십시요.

손명화: 그 자식들도 저하고 똑 같은 삶을 살고 있지 않습니까?. 통일이 된다면 유해라도 조국에 묻어달라는 자식들에게 유언을 남겨놓고 돌아가셨습니다. 그 자식들도 얼마나 한국에 오고 싶어 하겠습니다. 그 자식들도 저와 같은 형제로서 우리는 이땅에서 6.25를 잊지 말고 아버지의 명예를 꼭 찾아드려야 한다는 자식의 도리를 해야 하지 않겠는가 저는 이렇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궁금증을 풀어드립니다. 오늘은 국군포로 자녀 손명화 씨에게 대한민국 역사박물관에서 진행중인  전쟁포로는 평화를 말한다 는 행사와 관련한 의견을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이진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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