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상옥, 최은희 납치 전말

장진성∙탈북 작가
2013-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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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포항 도착직후 멀미를 삭히기 위해 조사부 부부장 강해룡 감시하에 산책하는 최은희씨.
남포항 도착직후 멀미를 삭히기 위해 조사부 부부장 강해룡 감시하에 산책하는 최은희씨.
사진-연합뉴스 제공

북한인민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김정일의 많은 범죄 중 남한과 국제사회에 잘 알려진 영화감독 신상옥, 영화 배우 최은희 납치 전말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신상옥, 최은희라면 아마 북한 주민들 대부분이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만큼 그들의 영화는 주체 영화이론에 포로가 됐던 북한의 문화를 크게 개혁시킨 위대한 예술 인들입니다. 촬영 기술도 놀라웠지만 시나리오 자체가 주민들의 일상에 많이 접근했었기 때문에 강압적인 수령주의 영화와 달리 문화적 충격과 감동이 매우 컸었습니다.

신상옥 감독은 북한 최초로 ‘신 필름’이라는 개인 명의의 영화사를 갖고 많은 명작들을 만들어냈습니다. 신 필름 회사는 평양시 대동강구역 문수동에 있는 지금의 조선중앙방송위원회 TV총국 건물이었습니다. 그만큼 김정일의 총애와 관심이 매우 컸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김정일의 직접 지시로 납치 해온 남한의 유명 영화 감독과 배우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북한 공작원들에 의해 납치된 시점은 1978년이었습니다. 당시 영화 '양귀비' 제작을 협의하기 위해 홍콩을 방문한 최은희 씨는 지인들과 함께 해변을 산책하던 중 어디선가 나타난 장정들에 의해 보트에 옮겨졌습니다. 최은희 씨는 공포에 질려 몇 차례 반항했지만 마취제를 맞고 정신을 잃게 되고, 그렇게 그녀가 항해 8일 만에 도착한 곳은 북한의 남포항이었습니다.

최은희 씨의 증언에 의하면 심한 멀미와 죽음의 공포로 질려있던 자신을 남포항에서 직접 마중한 사람은 키 작은 사람, 즉 김정일이었다고 합니다. 그때 김정일은 38세의 나이로 김일성 주의 세뇌를 위해 당 조직 부와 선전 부를 북한권력의 핵심부서로 규정하고 그 사업에 주력하던 때였습니다.

최은희씨가 실종되자 이 소식을 접한 신상옥 감독은 바로 홍콩으로 날아가게 됐고, 다시 최은희 씨를 찾아 프랑스, 일본, 동남아 등 세계 각국을 6개월 동안 돌게 됩니다. 빈손으로 다시 홍콩으로 되돌아 온 신 감독을 북한 공작원들이 납치하여 평양으로 끌고 오게 됩니다. 그러나 신상옥 감독과 최은희 씨가 북한에서 재회한 것은 납치된 지 5년 후인 83년의 일이었습니다. 북한에 협력할 것을 요구하는 김정일의 지시를 거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최 씨는 5년여의 세월을 가택 연금 상태로 보내야 했고, 신 감독은 탈출을 감행했다는 이유로 감방이나 다름없는 감금시설에서 지내야 했습니다. 마침내 북한 영화발전에 기여하겠다는 서약서는 받아 낸 83년 여름, 두 사람은 평양에서 운명적인 재회를 하게 됩니다. 그로부터 2년 동안 최은희 씨와 신상옥 감독은 북한에서 ‘신 필름’이라는 개인영화사 이름으로 많은 영화를 만들어내게 됩니다. 신 필름은 '돌아오지 않은 밀사', '소금', '탈출기' ‘홍길동’, ‘철길 따라 천만리’, ‘사랑, 사랑 내 사랑’ ‘불가사리’ 등 다수의 영화를 제작하며 국제무대에서 인정을 받기 시작합니다.

85년 신 감독이 연출한 북한영화 '소금'에 주연 배우로 출연한 최은희는 그 해 구 소련에서 열린 모스크바 국제영화제에서 여우 주연상을 수상했으니 비록 북한 영화로 출품됐지만 한국 인 최초의 여우주연상 수상인 셈입니다. 김정일은 신 필름을 격려하기 위해 자주 파티를 열곤 했었는데 그 기회에 최은희 씨가 몰래 녹음한 김정일의 음성파일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합니다.

김정일과 신상옥, 최은희 씨 사이에 있었던 첫 녹음 대화는 1983년 10월19일 저녁 6시부터 3시간 동안 평양 시내 노동당 중앙 당사 내 3층 김정일의 집무실 바로 옆 접견 실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최은희씨는 소형 녹음기를 핸드백 안에 넣고 가서는 그것을 발 밑에 두고 몰래 녹음을 했다고 합니다. 테이프를 바꿔 낄 수가 없어 3시간의 대화 중에서 45분 정도만 녹음되었습니다.

이날은 김정일이 지령한 버마 아웅산 테러로 우리나라의 엘리트 관료 17명이 객지에서 횡사한 지 10일이 지난날이기도 합니다. 서울은 국상을 당한 충격과 분노로 침잠해 있을 때 동족집단 살인의 지령 자 김정일은 즐겁게, 때로는 신들린 사람처럼 예술을, 또 영화를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김정일은 신 감독을 데리고 와 낙후된 북한의 영화를 발전시키려고 하나의 미끼로서 최은희씨를 먼저 납치해 왔다고 스스로 실토합니다. 이것은 아마도 납치공작의 최종 책임자가 자신의 범행을 육성으로 자백하여 물증으로 남긴 세계 최초의 사례일 것입니다.

이렇듯 김정일의 신임으로 국제무대에서 활동할 기회가 생기자 두 사람은 탈출을 감행하기 위해 치밀한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마침내 그 결심을 실행 할 기회가 찾아옵니다. 86년 베를린 국제영화제에 신 감독 부부가 북한 영화인 자격으로 참가하게 된 것입니다. 영화제를 마치고 북한으로 돌아가는 길에 1986년 3월 13일 오스트리아 빈 공항을 향해 달려가던 택시가 미국 대사관을 지나는 순간 그들은 택시 안에서 구르듯이 뛰쳐나왔습니다. 이들은 이내 대사관 안으로 사라져 정치적 망명을 요청했고, 미국은 워싱턴에 망명 처 제공을 약속했습니다.

이들이 바로 한국 최고의 여배우와 감독으로 활동하다 북한에 납치됐던 최은희, 신상옥 부부라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국제사회는 김정일의 범죄에 또 다시 경악하게 됩니다. 납북 8년 만에 극적으로 탈출에 성공한 것입니다.

탈출 후 신상옥 감독은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마유미’ 등 여러 영화를 제작하다가 2006년 4월 11일 밤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한국정부는 대한민국 영화계에 끼친 지대한 공로를 인정하여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하였습니다. 최은희 씨는 남한에서 자신의 파란만장한 삶을 뒤돌아 보는 회고록을 냈습니다.

김정일이 사망했을 때 최은희 씨는 기자들 앞에서 "그를 생각하면 분노는 치밀어 오르지만 사람이 세상을 떠난 데 대해 일단 조의를 표한다."고 말했습니다. 납치 범죄자인 김정일은 신상옥, 최은희 씨에게 사죄도 않고 죽었는데 최 씨는 자기의 운명을 농락한 김정일이지만 한 생명의 죽음으로 조의를 표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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