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으로 싸웠던 두 6.25참전 군인의 죽음

주성하-탈북자, 동아일보 기자
2019-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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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 사진 속의 미군 참전자 찾기운동을 벌이고 있는 참전자 베티 퍼킨스-카펜터(85)와 다른 한 참전자의 손녀 티아나 스티븐스. 이들은 미국 국방부가 1950년에 촬영한 한국전쟁 초기 사진 138장을 입수해 퇴역한 참전자나 가족들에게 전달하는 캠페인을 펼치고 있다.
한국전 사진 속의 미군 참전자 찾기운동을 벌이고 있는 참전자 베티 퍼킨스-카펜터(85)와 다른 한 참전자의 손녀 티아나 스티븐스. 이들은 미국 국방부가 1950년에 촬영한 한국전쟁 초기 사진 138장을 입수해 퇴역한 참전자나 가족들에게 전달하는 캠페인을 펼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사랑하는 북녘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요 며칠 저의 눈에는 미국과 한국에서 있은 두 노인의 장례식이 참 인상 깊이 들어왔습니다.

우선 미국 오하이오주 신시내티라는 곳에서 24일 6.25전쟁 때 미군으로 한국전에 참전했던 헤즈키아 퍼킨스라는 노인이 90세에 사망했습니다. 그런데 유족인 딸은 3800km 떨어진 캘리포니아주에 살고 있고, 몸도 아파 장례식에 올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공동묘지 관리소 직원이 생각하다가 인터네트에 글을 올립니다. “한국전 참전용사가 사망했는데, 이러이러한 사연이고, 고인이 가는 길에 외롭지 않게 장례식에 올 수 있는 사람은 와달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기적같은 일이 일어났죠. 그를 모르던 수백 명의 사람들이 몰려온 것입니다. 평양에서 라진까지 거리에 해당하는 수백km를 운전해 온 사람도 있고, 어떤 단체는 오토바이를 대거 동원해 운구를 호송했고, 군악대가 달려와 의식을 진행했습니다. 딸은 영상통화로 장례식을 지켜봤습니다.

이 장면은 왜 미국이 강국이고 미국의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미국은 해외에서 전사한 병사의 유해가 국내에 들어올 때면 거창하게 추도식을 엽니다. 북한에서 원수급이 사망할 때 운구가 거리를 돌고 하는 것을 떠올리면 됩니다. 미국은 다양한 인종이 섞여 살고 있는 나라이지만, 조국을 위해 희생한 사람에게는 모두가 한마음으로 존경을 합니다. 이런 존중이야말로 다민족 국가인 미국이 하나로 뭉쳐 목숨 바쳐 국가에 충성하게 하는 토대이기도 합니다.

퍼킨스 노인은 장성 출신도, 특별한 전쟁 영웅도 아니었지만, 단지 국가를 위해 전쟁터에 달려갔었다는 이유만으로 수많은 사람이 달려와 존경을 표한 것이었습니다.

또 하나의 죽음은 26일 폐암으로 조용히 숨을 거둔 95세 류기진이란 노인입니다. 그 역시 한국전 참전 군인이었지만, 편이 달랐죠. 그는 바로 비전향 장기수입니다. 류기진 노인은 함남 신흥군 하원천면 축상리에서 태어나 함흥농업중학교를 다녔고, 집에서 농사를 짓다가 해방을 맞았습니다. 20살에 공산당원이 되었고 전쟁 때 인민군 소위로 낙동강까지 내려왔습니다.

직책은 인민군 9사단 1중대 중대장이었는데, 낙동강 2차 도하작전 때 다리에 총상을 입었습니다. 후송 도중 북쪽으로 올라가는 길이 끊기자 지리산에 들어가 빨치산이 됐고, 1951년 12월에 사로잡혀 전쟁포로가 되었습니다. 광주 포로수용소에 수감됐는데, 전쟁이 끝난 후 정전협정규정에 따라 북으로 송환되어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습니다. 다른 포로와는 달리 빨치산 활동을 했다는 이유 때문에 11년을 감옥 생활 더 했습니다.

이 분은 1961년 36살에 출소해서 동두천 두부공장 노동자가 됐고, 결혼을 해서 자식도 4명을 낳았습니다. 이후 채소장사와 연탄배달 일을 하다가 쉰 살부터는 서울에서 택시운전을 시작했습니다. 87세까지 37년간, 귀가 어두워져 손님과 대화를 할 수 없을 때까지 택시운전을 했는데, 이후 7년을 더 살고 우리 나이로 95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분은 이루지 못한 소원이 두 가지 있었는데, 북에 돌아가 부모님 묘를 찾는 것과 인민군 소위로서 전역신고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소원은 이뤄질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살아생전에는 고향땅을 밟지 못했지만 나중에라도 유골은 꼭 고향땅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그의 장례식은 28일 가족과 양심수 후원회 회원들이 참여한 가운데 경기도 양주시에서 치러졌습니다.

저는 이 장면이 한국 사회를 잘 보여주는 단면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한국 전쟁 때 적이었고, 전향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한국 사회에서 나름 87세까지 일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북한에 끌려간 국군 포로는 어떻게 됐습니까? 직업 선택의 자유도 없고 아오지 탄광 같은 열악한 곳에 끌려가 대부분 일찍 돌아갔습니다.

한국에는 이 분과 같은 처지에서 북한으로 돌아가길 희망하는 비전향 장기수가 아직 열여섯 명이 생존해 있고, 평균 나이는 88세입니다. 1993년에 이인모 노인이 북에 송환됐고, 다시 2000년에 6.15공동선언으로 비전향장기수 63명이 그리던 북으로 건너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1차 송환 당시 미처 신청을 못했거나, 전향서를 썼다는 이유로 제외된, 엄밀한 의미에선 비전향 장기수는 아니지만, 아무튼 그런 분들이 남아서 2차 송환을 희망했습니다. 그러나 기회는 다시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북한이 적극적이었으면 노무현 정부 때 다 송환시킬 수도 있었는데, 북한이 부담스러우니 요청이 없었습니다.

왜냐면 올라간 사람들을 부총리급 대접을 해주다보니 너무 투자가 많이 들고, 한국에 남은 사람들은 전향서를 쓴 과거도 있으니 먼저 온 사람들처럼 선전에 이용해 먹기도 어렵죠. 또 다른 중요한 이유는 올라간 장기수들이 자꾸 한국이 좋았다는 이야기를 저도 모르게 하는 겁니다. 이인모 노인도 북한 감옥을 가보고 싶다 해서 제일 좋은 감옥에 가보게 했더니 “이런 감옥이면 내가 30년이 아니라 3년도 못 견뎠을 것이다”고 말해서 북한에 소문이 쫙 퍼졌죠.

이제 장기수 출신들을 데려와 봐야 북한 사람들이 뭐라고 할지 뻔합니다. “한국은 대체 어떤 사회이길래, 북한이 좋다고 신념을 지킨 사람들이 90세가 넘도록 잘 사냐” 이럴 것 아니겠습니까.

아무튼 미국과 한국에서 진행된 최근의 두 장례식은 서로 총을 겨누고 싸우던 세대의 퇴장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이들이 후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다시는 이렇게 서로 죽이고 죽이는 비극적인 일을 반복하지 말자”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다시 70년의 오랜 세월 우리는 여전히 총부리를 겨누고 있습니다. 걸어온 길은 다르지만 북녘 고향에 돌아갈 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저 같은 탈북민도 있습니다. 우리 세대의 아픔은 이제 더 이상 후손들에게 전달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며, 지금까지 서울에서 주성하였습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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