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의 진실, 소련의 괴뢰였던 김일성

주성하-탈북자, 동아일보 기자
2019-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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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1953년 7월 정전협정에 서명하는 김일성.
사진은 1953년 7월 정전협정에 서명하는 김일성.
/연합뉴스

사랑하는 북녘 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번에 철원에 갔던 이야기를 하면서 6.25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해드렸는데, 이번 주가 6.25전쟁이 일어났던 시기이니 그것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북한에서는 6.25가 북침이라고 하고, 김일성이 이 전쟁에서 승리한 백전백승의 강철의 영장이라고 선전합니다. 그런데 제가 남쪽에 와서 객관적인 증거와 자료들을 다 보면서 북한의 새빨간 거짓말에 속고 있는 북한 인민들이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6.25는 남쪽을 먹을 수 있다는 김일성의 욕심이 만들어낸 전쟁이었는데, 정작 본인은 전쟁 과정에 지휘권도 잃고 허수아비가 됐습니다.

북한의 전쟁 문서가 대량 공개된 것이 1990년대입니다. 소련이 붕괴된 뒤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이 1992년 11월 한국을 방문해 “6.25전쟁 때 우리가 개입해 많은 사람들이 죽은 것이 유감이다, 그때 문서를 다 공개하겠다.” 이렇게 약속했고 그걸 지켰습니다. 공개된 문서들을 보니 김일성은 1949년 봄부터 1950년 초까지 48차례에 걸쳐 스탈린에게 전쟁을 승인해 달라고 서한을 보냈습니다. 스탈린은 1950년 3월에 김일성을 모스크바로 불러 전쟁을 승인했습니다. 이처럼 김일성은 전쟁도 자기 마음대로 일으킬 수 없었던 소련의 괴뢰였습니다.

그렇게 전쟁을 일으켰는데, 예상치 못하게 유엔군이 참전하고, 북한군은 압록강까지 밀려났고 병력도 거덜 났습니다. 급해진 스탈린은 모택동에게 중국이 들어가라, 지원 많이 해주겠다 이렇게 지시했습니다. 그때는 중국도 힘이 소련보단 약했죠. 모택동은 결국 군대를 보냈는데, 얼마나 보냈냐면 3년 동안 전체적으로 500만 명이 참전했습니다. 참전 사단은 127개였고, 고지전이 최고조에 이른 1953년 4월부터 7월까지는 일시에 130만 명의 병력이 투입되기도 했습니다.

북한군은 낙동강에서 다 궤멸돼서 존재는 미미했죠. 이 때문에 김일성은 1950년 12월 3일 ‘조선·중국 연합지휘부 성립에 대한 조·중 쌍방 협의문’을 체결하고 중국군 사령관 팽덕회한테 지휘권을 넘겼습니다. 남쪽의 지휘권도 이승만이 아닌 유엔군이 갖고 있었습니다. 결국 6.25전쟁은 우리 민족이 개입 못하고 스탈린과 모택동이 다 결정했고, 이쪽은 미국이 다 결정했습니다.

6.25전쟁은 3년이나 치러졌지만, 1951년 3월부터 거의 지금의 경계로 전선이 고착됐는데 이때부터 죽은 사람이 훨씬 많습니다. 김일성도 38선에 전선이 고착된 1951년 6월부터는 휴전에 적극 찬성했습니다. 계속 끌어봐야 북한땅만 폭격을 받아 초토화되고, 병사들만 계속 죽어가는 이 소모전을 견딜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김일성이 아무리 모택동을 붙잡고 사정해봐야, 스탈린에게 호소해봐야 그의 말은 먹히지 않았습니다. 당시 박헌영도 “북한 인구의 10%가 기아상태에 있다”면서 빨리 전쟁 끝내자고 사정했습니다. 하지만 스탈린이 휴전을 반대했습니다. 여기서 밀리면 미국에게 밀려 체면이 서지 않고, 사회주의 맹주로서 자기 권위도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정전협상은 1951년 7월부터 시작됐는데, 조급한 김일성은 “유엔군 측의 요구를 다 수용하겠다”고 나섰습니다. 그러니까 스탈린이 김일성에게 전문을 보내 “나약한 모습을 보여 정치적 불이익을 가져왔다”고 핀잔을 주기도 했습니다. 중국도 소모전을 원치는 않았지만, 한편으로 이번 전쟁을 통해 중국군을 현대 장비로 무장시키려 애썼습니다.

그래서 계속 스탈린에게 무기와 군사원조를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팽덕회는 일단 미군을 38선까진 몰아냈지만, 완전히 한반도에서 몰아내긴 불가능하다고 봤고 또 그럴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미국을 북·중 국경에서 최대한 멀리 밀어내되 중국군을 불필요하게 희생시킬 필요가 없다는 게 그의 인식이었다.

그러니까 팽덕회는 주요 전투가 끝날 때마다 일부러 긴 휴식을 가지면서 소련에 군사지원을 요청했습니다. “탱크 달라, 포를 달라, 비행기를 달라.” 계속 요구했고, 스탈린이 막 짜증을 낼 때까지 요구했습니다. 한국전쟁 기간 동안에 중국군 부대의 3분의 2가 현대식 장비를 갖추는 성과를 얻었는데, 미군과 싸우는 대가로 전쟁 중에 소련한테서 단단히 지원을 받아냈던 것입니다.

결국 김일성이 전쟁을 일으켰다가 힘이 빠져 전쟁 지휘권을 빼앗기고 있는 동안 한반도는 강대국들의 힘의 대결장이 돼 애매한 인민들만 죽어갔습니다. 미군 폭격기는 쉬지 않고 북한을 폭격했습니다. 6.25전쟁 중에 무려 520만 명의 인구가 사망했습니다. 그 중에는 저의 가족도 있었고, 여러분의 가족도 있었습니다. 6.25전쟁 때문에 저희 집안의 운명도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6.25가 없었으면 50년 뒤 제가 남쪽까지 탈북해 올 이유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전쟁의 원흉인 김일성은 정전 협정을 맺어 이를 끝낼 힘도 없었습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1953년 3월 5일에 스탈린이 급사했습니다. 독재자가 죽자 소련 내각회의는 전쟁을 종결 짓는 쪽으로 한반도 정책을 바꿨습니다. 스탈린이 죽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생각하면 끔찍합니다. 전쟁이 1953년 7월이 아니라 몇 년 더, 어쩌면 우리 민족 대다수가 죽은 뒤에도 계속 한반도에서 전쟁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6.25전쟁의 진실은 이렇습니다. 전쟁을 지휘하고 휴전을 막아 수백 만 명의 희생을 초래한 스탈린은 우리 인민의 원수입니다. 소련과 중국의 꼭두각시였을 뿐인 김일성은 전쟁 뒤에 자기를 백전백승의 강철의 영장으로, 미제와 이긴 영웅으로 포장합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뒤 관리소를 만들어 남로당, 소련, 중국 계열 인사들을 포함한 반대파를 모두 정치범으로 만들어 수감시켜 왕조를 세우고 아들, 손자까지 대대손손 물려줬습니다. 이처럼 위대한 수령이란 인물의 한 껍데기만 벗겨도 부끄러운 거짓의 역사가 끊임없이 따라 나옵니다. 지금까지 서울에서 주성하였습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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