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서 잊혀진 한국전 ‘일등공신’ 남일 대장

워싱턴-정영 jungy@rfa.org
2016-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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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전회담 북한측 대표인 남일 대장(뒤에 선 사람)이 정전회담장으로 들어서고 있다.
정전회담 북한측 대표인 남일 대장(뒤에 선 사람)이 정전회담장으로 들어서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최민석: 북한에 계시는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한 주간 북한 선전매체의 보도를 다시 한번 뒤집어보는 ‘북한언론의 겉과 속’ 시간입니다. 오늘 진행을 맡은 최민석 입니다. 오늘도 정영기자와 함께 합니다. 정영기자, 오늘 우리가 나눌 주제는 무엇입니까?

정영: 북한 매체들이 소위 ‘전승절’이라고 주장하는 7월 27일을 맞아 대대적으로 분위기를 띄었습니다. 북한 외무성 대변인은 이례적으로 성명을 발표했고, 노동신문은 6.25전쟁을 찬양하는 시와 글을 싣고, 그 공을 김일성 전 주석에게 돌렸습니다. 하지만, 북한 매체들은 6.25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남일 대장에 대해서는 이름조차 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오늘 시간에는 북한측 수석대표로 정전협정문에 도장을 찍은 남일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최민석: 예, 북한의 남일 장군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정영기자, 북한이 7.27을 요란하게 선전하고 있는데, 북한 매체의 동향부터 알아볼까요?

정영: 그러시죠. 북한 매체들이 25일부터 7.27 전승 분위기를 띄우고 있는데요. 대남웹사이트 우리민족끼리에는 ‘수석대표의 미소’라는 동영상이 하나 올라왔는데요, 내용을 보니 남일 대장이 1951년 휴전담판을 위해 판문점으로 나갈 때 대형 승용차를 타고 나가는 영상이었습니다. 그 차인즉 서울주재 미국대사였던 무쵸 대사의 차였다고 합니다.

당시 북한군 105탱크사단이 서울시가에 들어왔을 때 무쵸 대사의 차를 노획한 것이라고 하는데요, 하지만, 그 수석대표의 모습을 보니까, 훤칠한 키에 잘 생겼습니다. 하지만, 이름이 소개되지 않았습니다. 당시 수석대표는 남일 대장이었습니다.

최민석: 남일 대장인데도 수석대표라고만 나오고 이름이 안 밝혀졌다? 남일 대장은 꽤 유명한데요. 북한에서는 남일을 잘 모르는 것 같군요.

정영: 외부사회에는 많이 알려졌지요. 하지만, 북한에서 나이가 50대 이상 그리고 전쟁 참가자들은 압니다. 하지만, 40대 이하 사람들은 남일 장군이 누군지 잘 모릅니다.

최민석: 남일 장군이 그렇게 감추어질 사람이 아닌데요, 굉장히 많은 일을 했지요.

정영: 북한에서 50대 이상 사람들은 남일에 대해 어떻게 기억하는가 하면요. 6.25전쟁시기 정전담판 장에서 미국을 특히 유엔군 수석대표를 상당히 괴롭혔던 인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최민석: 그렇지요. 남일장군이 휴전협정 당시 유엔군 대표와 사진도 많이 찍고, 자료가 많습니다. 그런데 남일에 대해서 북한에서 잘 모른다는 것은 이해가 안됩니다.

정영: 북한에 전쟁승리기념관이라고 평양시 보통강구역에 있는데요, 거기에는 남일 장군이 정면으로 찍은 사진, 이런 것은 없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 사진을 한번 보시면요, (북중 휴전담판 대표단 사진-남일, 리상조, 장평산, 중공군 2명) 이 세 사람이 휴전담판을 이끌었던 3인방이거든요. 남일 대장, 리상조 소장, 장평산 이렇게 되었는데, 이 세사람은 숙청되거나 사형됐습니다. 그래서 북한 주민들은 잘 모르는데요, 외부사회에서는 어떻게 알려졌습니까,

최민석: 한국전쟁은 잘 알려진 사실이고, 남일 장군이 휴전협정 당사자였기 때문에 사진도 많고 기록도 많습니다. 그리고 외부에는 남일이 잘 알려졌습니다. 그리고 김일성이 시작한 한국전쟁을 남일이 마무리를 지었다고 봐도 크게 잘못 된 것은 아니지요. 그는 휴전협정을 북한 쪽에 유리하게 가져가기 위해 굉장히 노력했지요.

정영: 그 당시 남일은 38살에 대장이 되었고, 유엔군측과 협상하는 입장에 있었지요.

최민석: 남일장군이 소련통이니까, 붉은 군대식 사고방식 때문에 유엔군측을 당황하게 하는 행동을 많이 했다고 해요. 아까 말씀했듯이 무쵸대사의 차를 타고 왔다든가, 아마 이것은 북한군이 유엔군에게 밀려 평양을 내줄 때 김일성 승용차를 뺏기지 않았습니까, 거기에 대한 작은 보복 정도로 볼 수 있고, 그래서 감정을 자극하고, 그리고 그 상황을 자기가 이용하려고 했지요. 암튼 정치적 감각이 뛰어난 사람으로 소문났지요.

정영: 북한에는 남일에 대해 어떻게 소문났는가 하면, 나이가 좀 든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남일장군이 아주 멋쟁이였다고 합니다. 별 네알을 달고 ‘땅꼬바지’를 쭉 빼 입고 무릎까지 올라오는 장화를 신고 회담장에 나타났다고 합니다. 거기에는 중국인민지원군 장성들도 있었는데 그들은 후줄근한 인민복을 입고, 인민모자를 쓰고 나왔지요.

최민석: 인민모에 인민복에 인민화를 신었습니다. 전형적인 모택동식 패션이었지요.

정영: 그런데 남일이 회담장에 나갈 때는 반짝 반짝하게 장화를 닦고 신고 나가서요. 유엔군 종군기자나 한국 기자들로부터 카메라 세례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남일은 그 후 잊혀진 전쟁영웅으로 되었습니다.

최민석: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잊혀지기 어려운 인물이거든요.

정영: 남일은 김일성보다 1~2살 정도 적지만, 훨씬 싸움도 잘했고요. 소련군에서 사단참모장까지 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최민석: 원래 남일은 김일성보다 훨씬 싸움을 잘하고 공로도 컸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정영: 남일은 어려서 소련 연해주로 이주했다가1930년대 스탈린의 강제이주정책에 따라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쫓겨간 소련 국적의 고려인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는 1939년에 소련 우즈베키스탄의 타슈켄트사범대학을 졸업하고, 2차세계대전 당시 소련군 대위로 참전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러다가 2차 세계대전 시기 가장 치열했던 스탈린그라드 작전에도 참여하여 독일군과 싸웠다고 합니다. 그 후 사단 참모장이 되었다가 8.15해방을 맞아 북한으로 돌아왔지요.

남일은 북한으로 귀국하여 김일성을 도와 건국사업에 기여했고, 6.25전쟁 발발한 후에는1950년 9월 29일 인민군 총참모장이 되었습니다. 전임자인 강건이 사망한 다음 그 자리에 올랐지요.

남일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51년 7월부터 시작된 휴전담판에 수석대표로 참가하면서부터였는데요, 그는 유엔군 측과의 담판에서 외교가, 군사가의 평가를 받고 전쟁이 끝난 다음에는 외무상에 오르는 등 북한 체제의 주역으로 역할했습니다.

그는 소련통이지만, 숙청을 당하지 않고 1976년까지 당 정치국 위원,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등을 지냈습니다. 하지만, 1976년 2월 남흥화학공장으로 내려가다가 교통사고로 사망했습니다. 이 사고도 의문의 고통사고여서 차사고로 가장한 암살이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는데요.

최민석: 이 교통사고 전에 김일성과 이해관계에서 알력과 마찰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지요?

정영: 그가 암살됐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 이유는 그가 사망한 다음 그의 이름이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청취자 여러분들도 아시겠지만, 남일보다 훨씬 못한 오진우나 류경수와 같은 직급이 낮았던 사람들의 묘지도 대성산열사릉에 있는데, 남일의 이름이 없다는 것은 그만큼 김 부자의 눈밖에 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일각에서는 김일성의 개인 숭배에 반대했고, 김정일로 이어지는 세습 정권에 반대했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최민석: 제가 알기에도 세습정치를 반대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정영: 그때가 1970년이기 때문에 김정일이 본격적으로 후계자로 올라오던 시기입니다.

최민석: 김정일이 후계작업을 본격화하고 1980년대는 후계자 자리에 앉지 않았습니까,

정영: 그리고 남일과 마찬가지로 휴전담판을 이끌었던 이상조 소장, 당시 북한군 정찰국장도 전쟁이 끝난 이후 소련대사로 파견됐다가 망명했고, 그 옆에 섰던 장평산은 북한 정권을 엎으려는 쿠테타 음모를 꾸몄다고 사형됐다고 합니다.

최민석: 문득 이런 말이 생각납니다. “사냥이 끝나면 개를 잡아 먹는다” 너무나 잘 어울리는 말이라고 봅니다.

정영: ‘토사구팽(兎死狗烹)이라고 하지요.

최민석: 네 그렇습니다. 결국 7월 27일 휴전회담을 성사시켰던 3인방은 결국 처형됐습니다. 북한이 남일 대장의 사진을 공개하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 있었습니다. 정영기자, 수고했습니다. 청취자 여러분 다음 시간에 뵙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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