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바지에 건 이념경쟁

워싱턴-박봉현 parkb@rfa.org
2014-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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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한 피복공장 여직원들.
북한의 한 피복공장 여직원들.
사진-연합뉴스 제공

앵커: 북한에서 일어나는 일이나 북한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일들을 진단하는 뉴스해설 ‘북한전망대’입니다. 이 시간엔 ‘여성 바지에 건 이념경쟁’에 관해 이야기해 봅니다.

박봉현 기자입니다.

‘옷차림이 편리하고 보기 좋게.’ 2009년 8월 9일 자 노동신문에 실린 여성의 바지 착용에 관한 기사의 제목입니다. 오랜 세월 여자의 바지 착용을 금지해 온 북한이 바지를 입고 싶어하는 여성의 숨통을 터주었습니다.

물론 이 조치로 자유세계 여성처럼 맘에 드는 바지를 제한 없이 입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청바지, 나팔바지 등 입지 말아야 할 종류를 조목조목 열거해 바지 착용 자유를 제한했습니다. 정확히 표현하면 ‘절반의 바지착용 허용’이었습니다. 그래도 일체 바지를 입지 못하던 여성은 앓던 이가 빠진 것처럼 시원했을 겁니다. 남한에서 넘쳐나는 이밥(쌀밥)이 북한에선 귀한 밥인 것처럼, 남한 여성이 자유자재로 골라 입고 거리를 활보할 흔한 바지가 북한 여성에겐 방에서나 입어볼 옷이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바지 착용을 허용한 지 약 5년 만에 북한 여성은 바지를 다시 옷장 속에 처넣거나 쓰레기통에 버려야 할 판입니다. 그냥 내동댕이치기 아까우면 가위로 잘라 걸레로라도 사용해야 할 상황입니다. 다시금 여성들이 바지를 입지 못하도록 했기 때문입니다.

여성의 바지 착용을 금지하거나 규제하는 풍경은 이슬람교 국가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종교적인 이유로 이런 제도를 갖고 있습니다. 여성의 자유를 침해하고 시대에 뒤떨어지긴 했지만, 나름대로 종교적인 신념으로 일관되게 시행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이슬람교 사회에서 여성의 불만은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북한의 이번 조치는 한번 자유를 주었다가 다시 빼앗는 것입니다. 2009년 바지 착용을 허용한 조치가 없었더라면 북한 여성이 느낄 상실감은 지금처럼 크지 않을 겁니다. 어느 정도 자유를 누리다가 수긍이 가지 않는 이유로 그 자유를 빼앗겼다고 여길 북한 여성의 상실감은 이만저만한 게 아닙니다. 근로자 월급을 (북한 돈) 3천 원에서 3만 원으로 올렸다가 다시 3천 원으로 내린 격입니다. 더욱이 아름다움과 맵시에 신경을 쓰는 젊은 여성은 울화가 치밀 겁니다. 특히 바지가 어울리는 여성은 “도대체 어느 놈 머리에서 이런 구상이 나왔느냐?”며 남이 듣지 않는 데서 욕을 해댈지 모릅니다.

북한이 여성의 바지 착용을 금지 한 이유가, 남한으로부터 스민 한류를 차단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남한 드라마를 보는 북한 여성이 남한에 물이 들면 사회적으로 나쁜 영향을 끼친다는 논리입니다. 옷을 입는 일은 인간의 원초적인 영역에 속합니다. 먹고, 입고, 자는 것은 사람답게 살게 하는 기본적인 요소입니다. 그래서 ‘식, 의, 주’ 라고 어려서부터 뇌까리고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입에 달고 살지 않습니까? 그런데 북한정권은 먹는 문제와 주거 문제도 해결해주지 못하는 주제에, 입는 일에까지 문제를 만들고 있습니다.

북한이 남한과의 이념투쟁을 벌인다면서 그깟 바지 하나에 호들갑 떠는 모습을 보여서야 어찌 이념 대결을 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진짜 이념투쟁을 하려면 북한의 이념 덕에 북한 사회가 남한 사회보다 어떤 면에서 얼마나 훌륭한지를 기회 있을 때마다 세상에 선전하는 게 정답일 겁니다. 정치가 얼마나 민의를 반영하는지, 경제가 얼마나 주민을 편안하게 하는지, 문화가 얼마나 다채롭고 풍성한지, 이런 소재에서 적어도 남한보다 자신이 있다면 얼마든지 자랑할 만합니다. 여자 바지를 갖고 물고 늘어지는 것은 이념 투쟁이라기보다 이념투쟁에서 패배하자 애꿎게 주민들만 들볶는 유치한 모습입니다.

농촌이나 공장에서 일할 때는 바지를 입어도 된다고 합니다. 치마를 입고서 일하면 생산성이 오르지 않고 안전사고 위험도 있기 때문이지요. 북한은 경제를 포함한 모든 분야에서 효율성을 가열차게 높여야 하는 나라입니다. 생산성과 효율성을 중히 여긴다면, 노동 현장에서 땀 흘리는 여성에게 번번이 옷을 갈아입으라고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바지 착용 금지는 북한이 부르짖는 ‘부국강병’ 실현에 역행하는 방침입니다. 다른 나라보다 더 열심히 뛰고 더 근면하게 노력해도 따라잡을까 말까 하는 처지에서 활동성이 떨어지는 치마 착용을 강요하는 것을 보면, 진정으로 ‘부국강병’을 원하기는 하는지, 아니면 김씨 일가의 권력만을 유지하면 된다는 것인지 의아해집니다.

북한이 여성에게 바지를 선물로 주었다 해도 갑자기 입지 말라고 하면 원성을 사게 마련인데, 제 돈으로 사 입은 바지를 입지 말라고 합니다. 바지 값을 물러준다는 것도 아닙니다. 소비자가 산 바지는 무용지물이 됐고, 상인이 팔려는 바지는 처치 곤란한 천덕꾸러기가 됐습니다. 옷맵시 자랑하려던 여성과 바지를 대량 구입해 놓은 장마당 상인의 성토가 이역만 리 떨어진 미국에서도 들리는 듯합니다.

바지 착용 금지조치가 몇 년 후 다시 풀릴 수 있습니다. 그러다 다시 몇 년 후 이런저런 이유로 또 금지될지 모릅니다. 세계화 시대의 무한경쟁 체제에서 모든 나라가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21세기에 여자 바지에 매달리는 북한의 답답한 현주소입니다.

RFA 자유아시아방송 박봉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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