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방 성경

워싱턴-박봉현 parkb@rfa.org
2014-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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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마식령호텔 내부.
강원도 마식령호텔 내부.
사진-연합뉴스 제공

앵커: 북한에서 일어나는 일이나 북한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일들을 진단하는 뉴스해설 ‘북한전망대’입니다. 이 시간엔 ‘호텔방 성경’에 관해 이야기해 봅니다. 박봉현 기자입니다.

미국인 관광객 제프리 파울 씨가 지난 5월 중순 북한에 억류됐습니다. 매튜 밀러 씨와 케네스 배 씨에 이어 북한에 갇힌 세 번째 미국인이 됐습니다. 조선중앙통신은 최근 파울 씨를 억류한 이유에 대해 “관광 목적에 맞지 않게 북한 법을 위반해 조사를 진행하고 있다”고 보도할 뿐 정확한 억류 배경은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미국에 남은 파울 씨의 아내와 어린 세 자녀의 충격과 걱정은 아랑곳하지 않는 듯, 외국인 관광객을 잡아놓고는 이렇다 할 해명이 없습니다.

미국 오하이오주에 거주하는 파울 씨는 기독교 신자입니다. 현지 언론과 일본 언론은 파울 씨가 북한 관광 중 머물던 호텔방에 성경을 두고 나온 것이 화근이었다고 전했습니다. 북한당국이 진실을 밝히기 전엔 억류 이유를 알 수 없지만, 호텔 방에 성경을 두고 나온 것이 억류 이유라면 북한이 얼마나 시대 흐름을 거스르고 있는지 짐작이 갑니다.

북한주민이 김일성을 신격화한 소위 ‘김일성교’만을 신봉하게끔 해야 하는 당국으로선 기독교가 북한 땅에 들어오는 것에 예민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호텔방에 남겨진 성경에 화들짝 놀라 미국인 관광객을 붙잡아두었다면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는 옛말처럼 엉뚱한 피해의식의 발로일 뿐입니다.

북한에서 외국인 관광객은 감시를 받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묶는 호텔에 대한 감시도 예외가 아닙니다. 관광객이 북한을 떠날 때 호텔방에 성경을 두고 나왔다고 해도 이는 당성이 강한 호텔 직원이나 감시원을 통해 관계 당국에 보고됩니다. 파울 씨의 억류도 결국 이런 과정에서 이뤄졌다는 추정입니다. 그렇다면 북한당국이 걱정하는 것처럼 호텔방 성경이 신앙에 목마른 주민들에게 전달될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파울 씨가 호텔방에서 성경을 읽다가 귀국준비를 하느라 깜빡 잊고 성경을 챙기지 못해 책상이나 침대에 그대로 두고 나왔을 수도 있습니다. 저는 불교 신자는 아니지만, 삶의 지혜가 가득한 불경을 애독합니다. 수년 전 미국 워싱턴에서 서부 로스앤젤레스에 갈 때 비행기 안에서 불경을 읽다가 잠이 들었고 공항에 도착했을 때 그만 실수로 비행기 안에 두고 내린 적이 있습니다. 파울 씨가 호텔방에 성경을 둔 것이 사실이라 해도 이를 북한당국이 겁내는 선교차원의 의도적인 행동으로 단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파울 씨가 선교를 목적으로 일부러 성경을 두고 나왔다 해도 북한당국의 처사는 온당치 않습니다. 이 책이 우여곡절 끝에 일반 주민의 손에 흘러 들어갔다손 치더라도, 복사시설이 여의치 않은 북한에서 과연 이 성경을 어떻게 많은 사람에게 배포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상황에서 호텔 방 성경 한 권이 북한에 기독교 신앙을 퍼뜨릴 거라는 생각은 기우에 불과합니다. 북한당국이 ‘김일성교’를 지키는 데 있어 바늘구멍도 허용하지 않는 자세를 하고 있지만, 대량 배포할 수 없는 성경 한 권에 소스라쳐 관광객을 억류했다면 스스로 자신감이 없음을 드러낸 것입니다.

성경은 문외한이 혼자 읽어서 그 뜻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굳이 불경과 비교하자면, 불경은 무작위로 읽어도 마음에 새길 불교 정신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하지 않으면 기독교 신앙의 요체를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초보자는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북한에는 성경학교도 인도자도 없습니다. 관제 목사가 설교하는 봉수교회가 있지만, 이는 기독교의 교회가 아니라 노동당이 만든 교회로 인도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주민이 모여서 성경을 공부하다 적발되면 즉각 수용소에 보내집니다. 이럴진대, 호텔방에 남은 성경 한 권이 호텔방을 빠져 나온들 대수이겠습니까? 그리 호들갑을 떨 일이 아닙니다.

북한당국은 최근 ‘독서 장려’ 정책을 적극적으로 홍보하고 있습니다. 지피지기, 상대를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라 하지 않습니까? 성경은 종교를 떠나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책이고 가장 많은 사람이 읽은 책입니다. 북한당국이 주민에게 성경을 읽으라고 권장하고 성경에서 어떻게든 시비거리를 집어내 트집잡고 물고늘어지는 게 ‘김일성교’를 더 굳건히 하는 방책이 아닐까요? 이런데도 호텔방 성경으로 외국인 관광객을 억류했다면 정말 소인배의 행동이 아닐 수 없습니다.

‘호텔방 성경’은 빌미이고 북한이 파울 씨를 억류한 진짜 이유가 미국과의 협상을 원해서일 수도 있습니다. 이미 미국인 두 명을 잡아두고 있는데도 미국정부가 꿈쩍하지 않자 추가로 파울 씨를 억류해 협박수위를 높여 미국의 관심을 유도하기 위해서라는 겁니다. 만일 그렇다면 더더욱 치졸합니다. 미국인 관광객을 가둬 미국정부에 무언가를 요구한다면 인권을 짓밟는 인질극을 벌이는 겁니다. 땅바닥에 떨어진 국가 이미지를 끝 모를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일입니다.

RFA 자유아시아방송 박봉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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