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 제3의 리설주’

워싱턴-박봉현 parkb@rfa.org
2014-07-14
이메일
댓글
Share
인쇄
2005년 9월 인천에서 열린 아시아육상대회 당시 리설주로 추정되는 여성이 인천 문학월드컵경기장에서 인공기를 꺼내들고 응원하고 있다.
2005년 9월 인천에서 열린 아시아육상대회 당시 리설주로 추정되는 여성이 인천 문학월드컵경기장에서 인공기를 꺼내들고 응원하고 있다.
2005년 9월 인천에서 열린 아시아육상대회 당시 리설주로 추정되는 여성이 인천 문학월드컵경기장에서 인공기를 꺼내들고 응원하고 있다.

앵커: 북한에서 일어나는 일이나 북한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일들을 진단하는 뉴스해설 ‘북한전망대’입니다. 이 시간엔 ‘제2, 제3의 리설주’에 관해 이야기해 봅니다. 박봉현 기자입니다.

‘발 없는 말이 천 리 간다’고 합니다. 사람들 사이에 소문이나 정보가 생각보다 훨씬 빨리 그리고 널리 퍼진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이웃에게 전하는 말은 다리는 없지만, 천리마처럼 무척 빠른 속도로 천 리 밖까지 전해진다는 겁니다. 이 속담은 말을 조심해서 해야 한다는 교훈을 담은 경구이지만, 어찌 됐든 사람들이 말을 퍼뜨리기 좋아해 소문은 입에서 입으로 전달된다는 현실을 말하기도 합니다. 특히 말 옮기는 데 민첩한 여성의 귀에 솔깃한 정보는 다소 과장하면 빛의 속도로 사회의 구석구석에 도달합니다.

현대는 정보 시대입니다. 북한은 평양 권력층이나 엘리트가 주요 정보를 독점하고 주민들과 나누길 꺼리지만, 자유세계에서는 정보전달 체계의 발전으로 거의 모든 정보가 공유됩니다. 정보 독점은 부패와 비리의 뿌리가 되지만, 정보 공유는 사회의 투명성을 높입니다. 정보 독점은 주민의 자유와 인권을 제한하지만, 정보 공유는 자유와 인권을 신장시킵니다. 정보가 독점된 사회는 타율적인 사회이며 정보가 공유된 사회는 자율적인 사회입니다. 그러므로 요즘 세상의 대세는 정보 공유입니다.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 가는 데 정보 공유만큼 중요한 것은 없을 겁니다.

정보 공유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여 온 북한 당국이 최근 흥미로운 결단을 내렸습니다. 북한은 7월 7일 ‘공화국 정부 성명’을 통해 오는 9월 남한 인천에서 열리는 아시아경기대회에 응원단을 파견하겠다고 했습니다. 중요한 대외정책 등을 밝힐 때 사용하는 정부 성명 형식을 취한 것은 응원단 파견에 그만큼 비중을 두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물론 북한의 응원단 파견이 북한 내 정보 독점 상황에 얼마나 영향을 미칠지 예단할 순 없습니다. 그러나 남한에 파견될 응원단은 귀국 후 북한 당국이 원하지 않는 정보 공유에 의미 있는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혁명적인 일은 아니더라도 정보 공유의 조력자 정도는 될 수 있을 겁니다.

북한 응원단은 외모와 사상을 기준으로 선발된 20대 초중반 여성 100명 안팎으로 구성될 전망입니다. 북한이 남한에 응원단을 파견하는 것은 이번이 네 번째입니다. 2002년 부산 아시아경기대회에 280명 규모의 응원단을 필두로 해, 2003년 대구 하계유니버시아드에도 300여 명이 파견됐었습니다. 이어 2005년 인천 아시아육상선수권대회에도 100명이 응원을 펼쳤습니다. 북한 응원단은 남한에서는 ‘미녀 응원단’으로 불릴 정도로 관심과 주목을 받았습니다. 대회의 각종 경기보다 응원단의 생김새와 일거수일투족이 더 주목을 받았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이번 인천 아시아경기대회가 끝나면 모두 약 800명의 북한 젊은 여성이 남한을 직접 발로 밟고 경험하는 게 됩니다. 비록 2주 남짓한 기간이고 북한당국이 응원단의 행동을 철저히 감시하며 제한하겠지만, 호기심 많은 20대 여성의 눈에는 30, 40대라면 무심코 보아 넘길 현상도 신선하고 강인하게 각인될 겁니다. 남한에서의 짜릿한 경험은 귀국 후에도 쉽사리 지워지지 않을 겁니다. 북한 최고 도시인 평양에서도 듣지도 보지도 못한 넘치는 자유, 넘실대는 역동성에서 받은 호기심은 고향 가는 길에 부러움으로 변할 겁니다.

응원단을 선발할 때 당성을 엄격하게 적용했으니 겉으론 서슬 퍼런 으름장에 조심하겠지만, 20대 젊은 여성의 마음에 울리는 잔잔한 파동까지 어찌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북한 지도자 김정은의 부인 리설주도 응원단 출신입니다. 2005년 인천 아시아육상선수권대회에 파견된 응원단 100명에 끼어 있었습니다. 이제 북한 최고권력자의 부인이 됐지만, 리설주의 복장은 왠지 북한 지도자의 부인에 걸맞지 않는다는 평이 있습니다. 북한사회의 잣대로는 파격적이라는 말도 많습니다. 리설주의 옷을 고르는 취향이 응원단 파견 때 남한 여성들의 옷맵시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리설주의 옷매무새는 부지불식간에 북한 여성들에게 유행을 낳게 됩니다.

미모를 자랑하는 응원단 여성들은 응원이 끝나면 각자 자기 고향, 학교 또는 일터로 갑니다. 남한에서 보고 들은 것을 절대 발설하지 말라는 불호령을 들었어도 입이 간지러워 참기가 어려울 겁니다. 사상교육이 잘돼 입에 자물쇠를 채운 듯 사는 여성이 있지만, 믿을 만한 친지나 직장 동료에게 “너한테만 털어놓는 비밀”이라면서 귓속말로 해주는 여성도 있을 겁니다. 이 ‘비밀’이 소문의 형식을 빌어 천 리 길을 달립니다.

약 800명의 응원단 출신 미모 여성이 모두 침묵한다 해도 이들의 취향이나 화장, 복장 등에서 남한의 유행이 묻어날 수 있습니다. ‘리설주 현상’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많은 북한 여성이 이를 따라 하면서 장마당에는 이런 물건이 불티나게 팔리게 됩니다. 이처럼 응원단은 북한 여성, 나아가 북한 주민에 남한의 생활상을 전달하는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응원단이 전해준 남한 정보가 북한 주민의 메마른 가슴을 한 방울 한 방울 적실 겁니다.

RFA 자유아시아방송 박봉현입니다.

원본 사이트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