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문회고록 낸 탈북 대학생 조셉 김

워싱턴-전수일 chuns@rfa.org
2015-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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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RNK (북한인권위원회), KEI (한미경제연구소)가 6월 8일 공동주최한 워싱턴의 코리아클럽에서 자신의 회고록에 대해 프레젠테이션 하는 조셉 김 학생.
HRNK (북한인권위원회), KEI (한미경제연구소)가 6월 8일 공동주최한 워싱턴의 코리아클럽에서 자신의 회고록에 대해 프레젠테이션 하는 조셉 김 학생.
RFA PHOTO/ 전수일

화제의 인물을 만나보는 RFA초대석, 진행에 전수일 입니다. ¬

미국 탈북자 구출단체의 도움으로 17살 때 미국에 온 함경북도 출신의 꽃제비 Joseph Kim-조셉 김씨. 이제는 스물다섯 살의 어엿한 미국 대학생으로 변신한 그가 자신의 북한 생활과 탈북과정과 미국생활에 대해 쓴 영문 회고록 ‘Under the Same Sky’를 펴냈습니다. 그는 이 책에서 헤어진 가족의 그리움과 재회의 꿈, 그리고 미국에서의 새 삶과 희망에 대한 의지를 펼쳐 보이고 있습니다. 오늘 초대석에서는 조셉 김씨를 모시고 헤어진 누나와 어머니,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회고와 미국 생활에 대한 얘기를 들어봅니다.

전수일: 최근에 발간하신 책 Under the Same Sky, ‘같은 하늘 아래’를 쓴 목적의 하나가 12년 전에 헤어진 누나를 찾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아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책에 묘사한 누나는 여느 동생이 생각하는 누나보다 더 애절한 것 같습니다. 누나는 어떤 분이셨나요?

조셉 김: 누나는 저보다 7년 위인데요, 정말 좋은 누나였습니다. 같이 있을 땐 몰랐습니다. 동생인 저와 아버지를 먹여 살리기 위해 고등학교도 중퇴하고 국수장사를 했죠. 그러면서도 한번도 불평해본 적이 없습니다. 동네 아저씨와 아주머니들은 ‘네 누나 같은 누나는 없다’며 누나 고마운 줄 알라고 하시곤 했죠. 이웃 어르신들로부터 늘 칭찬을 받았던 누나였습니다. 그때는 잔소리로 들렸지만 나중에 누나가 없어지고 나니 내게 누나가 얼마나 중요하고 얼마나 많이 베풀었는지 깨닫게 됐습니다. 12살 때 헤어졌는데 누나 없으니 저 혼자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더군요. 양말 신을 줄도 모르고 밥할 줄도 모르고 심지어 국수 삶는 것도 모르고. 제 누나는 동생을 위해 뭐든지 아낌없이 베풀어 주곤 했습니다. 예를 들어 부모님이 사탕 10개를 5개씩 저희 둘에게 나눠주면 누나는 하나만 먹고 나머지는 보관했다가 내가 감기로 열나거나 아플 때, 또 기분이 언짢을 때 숨겨 놓은 사탕을 한 알씩 주곤 했지요.

전: 특별한 누나였던 것 같습니다. 최근 워싱턴에서 있었던 조셉 김씨의 회고록 소개 모임에서도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2002년이 가장 비극적인 해였다고 생각됩니다. 그 해에 아버님 돌아가시고 어머님과 누님은 식량 구하러 중국으로 가 결국 혼자 남아 고아가 됐다는 것인데요. 근데 이번 회고록에서 처음으로 밝힌 것이라면서 어머니와 함께 중국에 간 누나가 중국인에게 신부로 팔려갔다고 했습니다. 그런 얘기는 누구한테 들었고 그 얘기를 듣고 어떤 감정을 느끼셨나요? 좌절감이 컸을 것 같습니다.

김: 저는 단 한번도 누나와 헤어져 사는 걸 생각해 보지 못했습니다. 누나를 다시 못 본다는 게 이해가 안 됐습니다. 그리고 이별 후에 가장 힘들었던 게 중국에 누나가 가면 몇 주 후면 볼 줄 알고 제대로 된 작별 인사도 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누나가 중국인에게 시집갔다는 건 어머니가 직접 말해줬습니다. 어머니는 당시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말씀했습니다. 누나가 중국에 있는 게 다시 북한에 돌아오는 것 보다 나을 것 같다는 말씀이셨습니다. 어머니는 아빠와 많이 싸웠습니다. 그래서인지 어머니에 대한 정이 누나보단 적었습니다. 학교 체육대회, 운동대회가 있으면 나한테 도시락 싸주고 간식 챙겨준 것도 누나가 더 많았습니다. 어머니는 아빠와 많이 싸웠고 집을 나갔습니다. 그런 것도 어머니에 대한 정이 덜한 데 영향을 줬을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어머니를 당시 이해하지 못했고 솔직히 미운 감정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하면 어머니로서도 누나를 보내는 것이 쉽지 않은 결정이었고 가슴 아픈 일이었을 것입니다. 사실 나를 위해 그런 선택을 했을 텐데 말입니다. 이해하지 못한 아들로서 죄송한 마음입니다. 처음으로 책에서 이런 얘기를 한 것입니다. 제가 테드 강연에서도 말했지만 ‘자고 일어나니 누나와 엄마는 사라졌던 것’입니다. 그러나 나를 낳아주신 어머니이고 어머니도 저를 사랑해 주셨다는 걸 알기에 그걸 말하기 쉽지 않았습니다. 또 딱히 그 말을 해야 할 이유도 없었습니다. 다만 책에서 그걸 밝힌 이유는 그 얘기를 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사정을 이해하기가 어려울 것으로 생각이 됐습니다. 왜냐면 그처럼 나를 사랑한 누나가 갑자기 아무 말 없이 하루아침에 나를 떠났다는 건 믿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른 이유는 그게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거기다가 또 제가 어머니한테 미안하다는 얘기를 책을 통해 할 수 있는 기회도 됐고요. 중요한 건 우리 어머니가 특별히 나쁜 어머니여서가 아니라 제가 태어난 국가 북한이 어머니를 그런 상황으로 가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어머니뿐만 아니라 다른 북한 내 가족들의 현실도 그러했다는 걸 밝히고 싶었습니다.

전: 최근 회고록 소개 모임에서 어머니는 아직 교화소에 수감돼 있다고 하셨는데요, 2년전 TED-테드 강연 마지막에 어머니한테 한마디 전하고 싶다며 ‘저를 태어나게 해 주셔서 고맙다’란 말을 하셨죠. 테드 강연은 세계적인 명사나 일반인들이 특별한 발견이나 자신의 경험을 얘기하는 국제 강연 무대인데 강연 방청객의 심금을 울렸습니다. 동영상도 142만 횟수나 시청한 걸로 나왔더군요. 어머니에 대한 정이 드러난 것이겠죠.

김: 그 자리를 빌어서 어머니에게 감사하단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죄책감도 컸습니다. 단 한번도 어머니에게 ‘태어나게 해주셔서 고맙다’란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 사정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것이 제일 힘들었습니다.

전: 마음이 아름답습니다. 2002년 아버지가 하늘나라에 가셨다고 했는데 아버지는 어떤 분이었습니까?

김: 아버지는 체계가 무너진 북한 사회에서는 살아 남을 수 없는 성품을 가진 분이었습니다. 원칙주의자였습니다. 예를 들어 친구에게 만년필을 빌리면서 다음날 12시 10분까지 돌려주겠다고 하셨으면 그 시간까지 돌려줘야 마음이 편했던 분이죠. 북한 사정이 온전했던 시절에는 아버지는 크게 성공한 분입니다. 아버지 없이 자랐지만 평범한 농민가정에서 태어나 24살에 당에 입당하셨죠. 가족의 배경이 없는데도 홀로 노력해 성공하셨습니다. 당에서 일하셨는데 마지막 직업은 기업의 회계사였습니다. 기업의 자금을 다뤘습니다. 그런 위치에 있는 다른 사람들은 기업 돈을 돌려서 장사도 하고 남에게 빌려주고 이자를 받으면서 무너진 북한사회에서 살아남는 길을 찾았었지만 우리 아버지는 그런 걸 잘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많이 다퉜습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그런 원칙에 대해 그것이 뭐가 중요하다고 자식들을 굶기냐면서 아버지를 이기주의자라고 많이 원망했습니다. 그런 상반된 성격으로 아버지와 어머니가 많이 싸웠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도 원칙을 지키는 분이셨지만 우리가 굶는 것을 더 이상 보지 못해 자신과 타협을 한 적도 몇 번 있습니다. 어머니에게 회사 돈을 빌려주면서 회사 돈이니까 언제 언제까진 갚아야 한다는 다짐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장사가 잘 안 되어서 돈 갚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하곤 했습니다. 그래서 아빠로서는 어머니와 다툴 만 했죠. 그만큼 아빠는 고지식하고 철저히 원칙을 지키는 분이었습니다. 붕괴된 북한사회의 환경에서 살아남기에 불가능한 성품을 가졌던 분이죠.

전: 너무 청렴하셨군요. 굶고 아사하는 고난의 행군시절.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는 비리와 불법행위를 할 사람들이 대부분일 텐데요. 북한 당국이나 당으로 볼 때는 굉장한 영웅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김: 하지만 정부 당국에선 그런 걸 알아주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돌아가셨을 때는 아버지의 당 증을 회수해 갔습니다. 그때 많이 울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아버지가 죽었는데 돈 한 푼 안 주고 당 증까지 뺏어갔습니다. 당 증은 아빠의 전부였는데도 말입니다.

전: 헤어진 누나를 기다리다가 결국은 누나를 찾아 나서겠다며 2006년, 열여섯 살 때에 중국으로 탈출하셨습니다. 중국에 들어가 링크 미국의 탈북자 구출 정착 지원단체인 LINK-링크 활동가의 도움을 받아 2007년 미국에 왔습니다. 고등학교에 입학했고 어렵게 공부해 훌륭한 성적으로 졸업을 한 뒤 지금은 뉴욕의 한 대학교에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전공이 국제경영학이라고 들었습니다.

김: 국제경영학은1년 반 동안 배웠고 지금은 정치학으로 바꿨습니다.

전: 정치학은 어떤 학문인가요?

김: 이번 새 학기부터 정식으로 정치학을 공부할 예정이라서 아직 많은 건 모릅니다. 다만 저는 역사 철학 등에 관심이 많고 비록 경제는 박사가 아니지만 대충 그 학문의 기본은 알게 됐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정치란 것이 무엇인지, 정부와 국가에 대해 배우고 싶습니다. 그래서 전공을 바꿨습니다. 아마도 정치와 경제를 혼합한 공부를 할 것 같습니다.

전: 그럼 사회에 진출해서는 그런 전공과 연결되는 일을 하시고 싶을 것으로 생각되는 데요.

김: 일단은 기업체에서 일해보고 싶습니다. 미국의 큰 회사에서 일하는 경험을 쌓으면 나중에 NGO-엔지오에서 일할 때 도움이 될 것 같아서입니다.

전: 엔지오는 비정부기구, 일반 민간단체를 지칭하죠?

김: 그렇습니다. 일단 경험을 쌓기 위해 그렇게 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저는 결국 북한인권을 위한 엔지오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찾는 게 목표입니다.

RFA 초대석, 이 시간에는 최근 영문 회고록를 펴낸 함경북도 꽃제비 출신의 탈북 미국대학생 Joseph Kim - 조셉 김씨를 모시고 그의 과거 북한 생활과 헤어진 가족 얘기를 들어 봤습니다.

저는 전수일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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