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도 오늘처럼 행복하게

워싱턴-이진서 leej@rfa.org
2019-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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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인권위원회의 상담원들이 탈북자를 대상으로 인권 문제를 상담하고 있다.
국가인권위원회의 상담원들이 탈북자를 대상으로 인권 문제를 상담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북한에서 초등학교 교사였던 탈북자는 남한생활에 많은 충격을 받습니다. 자신이 북한에서 주민을 상대로 했던 강연과 현실이 많이 틀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남보다 더 열심히 공부하고 자격증을 따고 현실 파악에 나섰는데요. 그런 노력이 결실을 맺어 이제는 자신보다 뒤에 남한에 입국한 탈북자의 정착을 돕는 역할을 맡아 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늘푸른 상담협회 박정순 대표의 이야기 전해드립니다.

박정순: 맥이 없고 누워서는 일어나질 못하고 계속 앓았어요. 병원에 입원했다가 나와서는 또 들어가고 어쨌든 119를 계속 타고 다녔어요.

박정순 씨의 초기 남한생활 모습입니다. 정신적 충격이 너무 컸던 겁니다. 119를 계속 타고 다녔다는 말은 응급차로 병원에 자주 실려 다녔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남한생활 5년동안 병의 원인과 이름도 모른채 앓아야 했습니다.

박정순: 충격 때문에 그랬어요.

기자: 불안하고 앞날에 대한 걱정 근심이 몰려와 쓰러진 것이군요?

박정순: 아니요. 내가 중국에서 3일만에 딸이 한국 갔다고 한 말을 듣고 졸도했어요. 북한의 교사가 하는 일이 인민반마다 나가서 남한에서 안기부를 풀어서 연변까지 와서 탈북자를 사가지고 간다. 탈북자를  데려다가 피를 뽑고 죽인다는 것을 우리가 선전하던 사람이예요. 그러다보니까 겁을 먹고 충격받은 거죠. 자본주의 사회에 허망되게 어린 딸을 보낼 수는 없잖아요.

얘기를 들어보면 마음의 병이었지 않나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갑자기 딸이 남한에 갔다는 소릴 듣고는 중국에서부터 걱정이 많았는데 남한에 입국해서도 쉽게 해소가 안됐던 겁니다.

박정순: 제가 중국에 사촌들이 있어요. 그래서 거기에 딸을 보냈거든요. 우리가 중국에 들어갈 일이 있었기 때문에요. 그런데 내가 들어오니까 딸은 이미 한국을 향해 가고 있었어요. 북한에서 딸하고 전화연결을 하고 언제쯤 엄마가 중국으로 넘어 올께 했는데 딸은 내가 넘어올 것을 알았으니까 브로커한테 전화 번호를 줬더라고요. 그런니까 브로커들은 나한테 수시로 전화를 하는 거예요. 그래서 통화가 됐는데 딸은 이미 한국으로 출발해 가고 나는 중국에 들어왔고 이런 상태였어요.

북한에서는 10년동안 교사생활을 했던 박 씨. 2004년에 중국의 북경 한국 대사관을 통해 남한행을   결정했고 무사히 도착합니다. 그때 박 씨의 나이는 49살인데요. 건강이 안좋아 병원을 다니긴 했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하면서 병원신세만 진 것은 아닙니다. 새로운 인생을 준비하는 일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박정순: 2005년부터 대학을 다니면서 상담소를 운영했어요. 처음에는 탈북자 상담을 해주는 곳이 없어서 누군가는 해야 한다는 생각에 했어요. 처음에는 건물이 없으니까 등록을 못하고 집에서 몇 달을 하다가  나중에 월세 30만원 나가는 사무실을 얻어서 거기서 상담소를 운영 했어요

기자: 몸이 아파서 쓰러지고 남한생활을 모르는 상황에서 어떤 것을 상담해 주셨나요?

박정순: 탈북자 정착지원 상담요.

기자: 본인이 정착이 안된 상태에서 남한생활을 모르는데 그것이 가능합니까?

박정순: 제가요. 이 상담소를 하면서 자격증만 60개를 땄어요. 남한사회를 알기 위해서요. 하루도 쉬는 날이 없어요. 잠도 제대로 못자고요. 그래서 더 쓰러졌어요. 북한에서 배우고 온 사람들 그러니까   대학졸업한 사람은 정착하는데 도움이 돼요. 저는 남한사회를 너무도 빨리 들여다 봤어요.

기자: 그 요령은 뭔가요?

박정순: 내가 살아남자니까. 저도 와서 두 달은 방황했어요. 그런데 이래선 안되겠구나 하고 이 땅에서 컴퓨터하고 운전면허는 필수구나 하고 컴퓨터 학원에 가서 4개월 과정이었는데 3개월째 쓰러졌어요. 그리고 2005년 1월 대학에 입학했어요. 대학 2년을 하고 나니 시간낭비가 될 것같아서 대학원을 같이 공부했어요. 주변 사람들이 대학과정과 대학원 과정을 동시에 못한다 만류 했지만 저는 병행 했어요. 여기서 공부하는 사람들도 공부하다가 손놓는 사람이 많으니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 가라고 했지만 저는 그냥 했어요. 그러면서 자격증을 따기 위해서 전국각지를 다녔어요. 왜냐하면 내가 알아야만 상담을 할 수 있잖아요. 그렇게 전국을 다니면서 자격증을 따는 과정에 쓰러져서 병원에 입원고 하고 정말 힘들었어요.

지나고 보면 웃을 수도 있고 별거 아닌 것 같지만 당시에는 하루하루가 전쟁처럼 치열한 삶이었습니다. 문제가 있으면 피해가기 보다는 정면으로 맞서 해결책을 찾았고 그러는 과정에서 현실 생활에  자연스럽게 적응이 됐습니다. 이것을 굳이 말로 표현하자면 눈뜬 봉사처럼 지내다가 어느날 자고 일어나니 세상이 선명하게 보이더라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박정순: 제가 이 사회에 와서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내가 적응이 힘들다. 이것을 간파하고 공부를 시작했는데 그리고 한편에서는 상담을 하다보니까 뭐가 보이는가 하면 우리가 들어갈 구석이 많네 이런 것을 느꼈어요. 그래서 탈북자 상담을 하면서 너희만 준비돼면 들어갈 구석이 많다 그러니까 공부를 해라. 제가 계속 그런 말을 해주고 있어요.

열심히 살다보니 세월이 흘러 이제 남한에서도 10년 넘게 살았는데요. 가끔은 그때 결심을 하지 않고   중국에 왔다가 북한으로 돌아갔더라면 지금 어떻게 됐을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방송을 듣는 여러분은 현재 박 씨가 남한생활에 만족하는가 하면 어떻게 답변할 것이라 생각되십니까? 기자가 그 질문을 해봅니다.

박정순: 만족하죠. 오기도 잘했고요. 내가 이런 말을 합니다. 북한에서 김정일이 숱한 사람 공부시켜서 남한 땅에 보내줘 감사하다고.

기자: 요즘은 어떤 일을 하십니까?

박정순: 제가 2005년에 늘푸른 상담협회라고 비영리 법인을 만들었어요. 그리고 제가 또 문예교육 봉사를 하기 시작했어요. 그러다가 2010년에 서울시 교육청으로부터 학력인정 기관으로 인정을 받아서 운영하고 있어요. 그리고 이번 금년 3월에 정부로부터 예산을 받기 시작했어요.

현재 운영하고 있는 상담소는 초기보다 다양한 교육상담을 하고 있는데요. 그중 하나는 가정행복상담 센터라고 가족간 발생할 수 있는 문제들을 듣고 함께 해답을 찾는 겁니다. 그리고 교육의 기회를 놓친 노인들을 위한 문예교육도 함께 진행하고요. 이렇게 바쁘게 살면서도 늘 보람을 느낀 답니다.

박정순: 우선 한국에 와서 사는 것이 누구의 강요를 안받고 내 자신이 스스로 알아서 해가는데 처음에는 내가 계획을 모두 세워 하자니 힘들었어요. 5년안에 적응하고 10년안에 정착하겠다 하고 생활하니 힘들었는데 지금은 하나하나 일하는 데서 보람이 있어요. 졸업생들이 너무도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 내가 정말 저들에게 기쁨을 주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고 아이들이 검정고시를 보고 신학대학을 졸업하는 모습을 보며 만족하고 상담을 통해 여러 문제를 해결해 줘서 그들이 기뻐하는 것을 보면 정말 행복합니다.

올해 특별한 계획은 따로 세우지 않고 현재 운영하는 상담소가 잘 진행되기를 바란다는 박정순 씨. 내일도 오늘처럼 열심히 살것이라고 합니다.

박정순: 저는 우선 받아준 한국 정부에 감사의 말을 하고 싶습니다. 내가 북한에 있었으면 박사가 될 수 있었겠습니까? 여기 와서 북한 일반 평교원이 박사도 됐고 교수도 됐고 해서 나는 정말 만족합니다.  내가 노력한만큼 이 사회에서 성과를 낼 수 있다는 것이 보람이 있습니다. 앞으로도 내가 맡은 일에서 누군가를 도울 수 있는 것이 보람된 것이기 때문에 계속 이길을 가겠어요.

제2의 고향 오늘은 늘푸른 상담협회 박정순 대표의 이야기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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