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고향] 3형제 탈북 한의사, 막내 박세현 원장

워싱턴-이진서 leej@rfa.org
2012-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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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현 묘향산 한의원 원장.
박세현 묘향산 한의원 원장. 사진-박세현 원장 제공
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남한에는 함경북도 출신으로 탈북 해 남쪽에 가서 한의사가 된 3형제가 있습니다. 모두 묘향산 한의원이란 이름으로 한방병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이들 중 막내인 박세현 원장의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북한에 있을 때는 최전방에서 군 생활을 하다가 탈북 해(1997년) 남한으로 갔을 때 박세현 씨의 나이는 23살.

박세현: 처음에는 주유소에서 일도하고 식당일, 중국집 배달원, 식당에서 고기 구워주는 일도 했는데 평생 이렇게 살아간다는 것도 깝깝하더라고요. 힘이 있을 때는 이렇게 한다 치고 나중에 나이 먹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때 당시 둘째형이 경희대학교 한의학과 졸업반이었습니다. 형을 보면서 나도 공부해볼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북한에 있었으면 군대생활도 10년 넘게 하는데 공부 6년이야 못하겠냐는 생각으로 형의 도움도 받을 겸 한의과 대학에 들어갑니다. 이런 저런 남한생활 경험을 3년 한 후라 사회적응은 어느 정도 됐지만 대학 생활은 또 다른 세상입니다.

기자: 막상 대학에 가보니 어떻던가요?

박세현: 처음에는 까짓껏 두만강도 건넜는데 ...총도 맞고, 칼도 맞고 도끼에 머리 맞아서 꿰맸고 했었거든요. 겪을 것을 다 겪고 죽을 고비도 넘겼는데 공부하나 못하겠나 했습니다. 그런데 두만강 넘을 때 정신하고 공부는 별개더라고요. 형이 영어보다는 한자를 많이 알아야한다고 해서 한자를 1만 5천자를 공부하고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들어가서는 영어 때문에 애를 먹었습니다. 그리고 교수들이 가르칠 때 영어를 많이 써서 못 알아들었고 우리말 하는 것도 억양 때문에 수업을 따라가기 힘들었습니다. 저는 그냥 90분 강의 동안 멍하니 그렇게 1년을 고생하면서 원형탈모 걸리고 체중이 7kg 빠지더라고요.

남한에서는 중 고등학교 성적 상위 3%만 입학할 수 있다는 한의과대학. 박세현 씨는

남쪽 강원도 원주에 있는 상지대학에서 다시 하라면 엄두가 나지 않는 6년을 보냅니다.

박세현: 이것을 못하면 다른 것도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저 사람들이 한 시간 공부하면 난 덜자고 공부하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친구들은 수업시간에 다 머리에 넣고 수업 끝나고 나가서 당구치고 볼링치고 놀아요. 전 수업 끝나면 집에 가서 논어, 맹자 보고 16과목이 되니까 못 놀았습니다. 진짜 그때 머리털이 빠지고 살이 빠지도록 이 악물고 한 거죠.

기자: 공부에 소질이 없는 사람도 잠 안자고 책만 보면 되는 겁니까?

박세현: 할 수 있다고 봅니다. 본인의 열정, 지구력, 간절함... 목표를 확실히 세우고 하면 된다고 봅니다. 제가 했잖아요.

기자: 형도 원형탈모에 고생했다고 했는데 1년 고생 하고 어느 정도 지나서 적응이 되던가요?

박세현: 1년이 넘어가니까 괜찮더라고요.

기자: 6년 대학 시절 중 좋은 기억은 없습니까?

박세현: 강릉대학교 여학생을 소개로 만난 겁니다.

기자: 그것이 첫 번째 남한 여성과의 만남이었나요?

박세현: 네, 첫 번째 만난 남한 여성이자 지금의 부인이죠.

박세현 씨는 한의사가 되기 전 결혼해 첫째를 낳았고 이제 곧 둘째를 맞습니다. 한의과

대학을 졸업 후에도 고비는 있었는데요. 졸업 후 치룬 한의사 국가 면허 시험을 너무

쉽게 생각했다가 1년에 한 번 있는 시험을 3번이나 본 겁니다.

박세현: 처음에는 긴장이 되고 오금이 저리고 죽겠더니 한번 해보니 별거 아니더라고요. 그래서 하면 된다하고 심각하게 생각 안한 거예요. 그런데 두 번째 또 떨어졌습니다. 첫해에는 9명이 떨어지고 두 번째 해에는 5명이 떨어졌습니다. 그때 우리 학급에 60명이었거든요. 안 되겠다 해서 떨어진 친구들과 뭉쳐 공부를 했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거짓말 안 하고 도서실에 라면 쌓아놓고 치약, 칫솔, 수건 가져다 놓고 방석 깔고 앉아 공부를 했습니다. 그때 또 살이 한 6-7kg 쫙 빠지더라고요. 시험을 딱 치고 나오는 데 이번에는 붙었구나, 느낌이 오더라고요.

기자: 한의사가 된 이후 생활이나 생각이 달라졌습니까?

박세현: 많이 달라졌습니다. 일단 시험에 붙고 나니 등에 진 짐을 내려놓는 느낌이었습니다. 학교 때는 의대생이라 인기가 있었고 한의사가 되고 보니까 난 똑같은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주위에서 보는 시선이 달라지더라고요. 북한사람이고 한국 사람이고를 떠나 대하는 것이 틀리고 북한 사람이라고 하니까 오히려 더 대단하다고 하는 겁니다. 한국 사람도 하기 힘든 공부를 했다는 것이 존경스럽다고 말씀들 하시고요. 학교 때는 한 달 생활비가 20만 원으로  모든 것을 해결했는데 이제 한의원 차리고 나니까 수입이 생겨 차도 사고, 집도 한 30평 짜리 아파트를 구입하게 되고 확실히 많이 달라지더라고요.

기자: 보통 쉴 때는 여가를 어떻게 보내세요?

박세현: 아이하고 놉니다. 운동은 한의사들이 모여 하는 축구 모임에서 화, 목, 토요일은  축구하고 월, 수, 금요일은 퇴근 하고 등산을 합니다. 모임에 6명이 나오는데 치과의사, 변호사, 사장 등이 있는데 오르막 한 시간 반 내리막 한 시간 반해서 3시간 등산을 합니다. 일요일은 꼭 가족과 함께입니다. 집사람이랑 아이랑 시골 같은 곳에 가서 물고기 잡아서 어죽도 쑤어먹고 도시락 싸가서 먹고 오고 그러죠.

자기가 아프면 치료해도 환자가 잘 낫지 않는다면서 운동을 열심히 해서 자신의 센 기를 팍팍 줘야 한다고 말하는 박세현. 가족에게는 좋은 남편이자 아빠로 또 한의사로는 옆집 아저씨처럼 누구나에게 편한 의사가 되고 싶은 것이 꿈이라고 했습니다.

제2의 고향, 오늘은 남한에서 이름난 탈북자 3형제 한의사 중 막내인 경기도 양주시 묘향산 한의원 원장 박세현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사이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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