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 매일 먹어요

워싱턴-이진서 leej@rfa.org
2019-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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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통영 연화도에서 맛보는 별미 '매운탕 라면'.
경남 통영 연화도에서 맛보는 별미 '매운탕 라면'.
/연합뉴스

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북한에서는 꼬부랑 국수로 알려진 라면. 이 라면을 매일 직접 만들 수 있는 식품공장에서 일한다면 어떻겠습니까? 1990년대 북한의 고난의 행군 시절 탈북해 남한에 사는 한 여성의 직업이 바로 그런데요. 오늘은 라면을 매일 먹었도 맛있다는 무산출신의 이기숙 씨의 이야기 전해드립니다.

이기숙: 어쨌든 회사 점심식사 메뉴에 한주에 한 번은 꼭 라면을 줘요. 수요일은 라면 먹는 날이예요.

남한생활이 16년되는 이기숙 씨. 탈북해서 남한땅을 밟기까지 사연은 간단치가 않습니다.

이기숙: 저는 2002년에 한 번 강제북송을 당해서 북한에 나갔던 적이 있고요. 그 이후에 2003년 남한 입국해서 온 가족이 왔으니까… 한국 생활에 무리없이 정착해 살고 있어요. 막내를 내가 입국할 당시 임신 6개월이었는데 이젠 고등학교 1 학년이 됐어요.

탈북과 강제북송 그리고 재탈북에 성공해서는 중국과 러시아를 거쳐 어렵게 남한에 정착합니다. 지금은 생활의 안정을 찾았지만 초기 정착 시기에는 어린 자녀들을 보살피며 어떤 일을 할 수 있을지 생각이 참 많았습니다. 뭐든 일할 마음의 준비는 됐는데 직장을 찾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이젠 과거 일이 됐으니 웃으면서 말할 수 있지만 당시를 떠올리면 더 이상 떨어질 수 없는 밑바닥에 있는 심정이었답니다.

이기숙: 걱정이 많았죠. 그런데 자본주의 사회라는 것이 열심히 일하면 노력의 대가는 어느정도  뒤따르더라고요. 한 회사에서 꾸준히 일하니까 생활이 점차 나아지고 이제는 여기 보통 남한의 아줌마 사원이 돼서 아이 결혼 시키고 내 노후준비 걱정을 하는…

남한에 첫발을 내딛던 시절을 얘기하다보니 제일 가슴졸이면서 힘들었던 순간은 잠시나마 아이들과 떨어져 있던 시간이었습니다. 남한까지 안전이 보장되지 못한 길이라 가족 모두 다시 북송될 것을 걱정해 아이들을 두고 먼저 남한에 가서 부른다고 했던 것이 생이별이 됐습니다. 그후 기적적으로 1년반 만에 남한에서 딸과 아들을 만나 온전한 가정을 이룰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땐 남한에서 태어난 막내가 언니 오빠를 맞이했습니다. 이 씨가 처음 직장생활을 시작했을 당시의 이야기도 들어볼까요?

이기숙: 직장생활 처음에는 힘들었어요. 그땐 우리회사에 탈북민으로는 처음 입사했고 해서 보는 눈도 이상하고 북한이 미사일 발사 했을 때 이기숙 씨 북한에서 또 미사일 쐈데 이러고 한번은 교육을 갔는데  북한에서 대포동 미사일을 쐈었어요. 그때 교육하는 강사가 사람들 앞에서 내가 탈북자라고 말했는데  무섭더라고요. 그런 기억도 있어요.

그냥 열심히 일해서 남들과 똑같이 대해주면 좋겠는데 자꾸 주변사람들이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는 것같아 불편했습니다. 대화를 나누다 보면 거센 억양 때문에 중국 조선족인가 하고 물었고 자주 고향이 어디세요라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북한에 대한 인식이 안좋았기 때문에 솔직하게 탈북자라고 굳이 밝히고 싶지도 않았는데요. 지금 생각해보면 남들은 안그랬는데 괜히 자격지심에 더 힘들지 않았던가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한 직장에서 쭉 근속하고 있는 이 씨가 다니는 회사는 어떤 곳이냐구요?

이기숙: 마요네즈와 케찹은 국내생산에서 시장 점유율이 98 페센트인데 내가 입사할 때는 오뚜기 라면 만드는데 회사였는데 입사했던 2004년에는 시장점유율이 9페센트 정도였는데 지금은 시장점유율이  26페센트까지 회사가 3배정도 커졌고요. 내가 일하는 공정에서는 내 위 언니는 전부 정년을 했고 내가 제일 고참이 됐어요.

기자: 북한식으로 말하면 꼬부랑 국수 만드는 건데 어떤 식으로 생산합니까?

이기숙: 제일 처음 밀가루 반죽을 하고 증기로 한 번 찌고 기름에 튀겨서 포장을 해서 건더기, 액상, 분말 스프를 넣어 포장해서 나가는 공정이예요.

국수를 찌고 튀겨서 한사람 먹을 분량으로 만들고 파와 양파 등 말린 양념에 고추장과 기름을 섞은 액체 봉지까지 다 들어가면 하나의 제품이 됩니다. 10년 넘게 매일 라면 생산 공장에 출근하면서 이젠 최고 기술자가 된 이기숙 씨

이기숙: 출근하면 회사에서 사료차가 나가요. 공정에서 불량면들을 수거해서 처리하는 데 사실 사람이 먹어도 괜찮거든요. 사료차가 나갈 때마다 무슨 생각이든지 아세요. 북한에서 강제북송 당했을 때 그  감옥에서 아이들이 못먹고 굶고 이럴 때 이걸 먹으면 좋겠다 하고 10년간 사료차를 볼때마다 항상 그 생각이 들었는데 10년이 지나니까 그 생각이 점차 없어지데요.

아무리 맛있게 먹은 음식이라도 아침에 먹고 또 점심에 같은 음식을 먹으라고 하면 인상을 찡그리게 되는데요.

기자: 어떤가요. 많이 먹어서 질리나요?

이기숙: 라면이야 항상 맛있죠. 지금도 회사에서 라면 주는 날이면 빨리 나가서 라면 불기전에 먹고 싶고 그래요.

라면생산 공장은 집에서 버스를 타고 50분 정도 가는 곳인 충청북도에 있습니다.

이기숙: 집에서 아침 7시에 나가고 저녁 6시 50분까지 마지막 반죽을 내리고 회사에서 씻고 8시 10분 퇴근 버스를 타서 집에 오면 9시 조금 안 되죠.

라면 만드는 일은 정년퇴직을 할때까지 계속할 생각입니다. 생활도 안정이 됐구요. 이제는 남한생활에서  탈북자이기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일은 없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누구나 생각하는 그런 문제만 있을 뿐이랍니다.

이기숙: 이제는 초조해 한다고 해서 해결될 일도 아니고 해서 괜찮아졌어요. 아들 결혼 준비로 전세 잡아주려고 해도 1억 5천만원은 있어야 하니까…잘사는 집은 물론 그보다 더 잘해주겠지만 그 정도는  해줄 계획이고 또 욕심에 나도 이제는 영구임대 아파트에서 벗어나서 더 좋은 아파트에서 살고 싶은 생각도 있고요.

기자: 딸 시집 보낼 때는 어땠습니까?

이기숙: 여기서는 딸 결혼 시키는 것은 한 4천 만원이면 됐어요. 딸은 집은 안사고 가전제품 사는 것도  한 1천만원이면 텔레비전, 냉장고는 얼마든지 살 수 있으니까요. 아들 결혼 시키는 것이 집을 해줘야 하니까 문제예요.

아들은 직장에 다니고 있는데요. 사귀는 여자가 있어서 조만간 결혼을 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남한에서는 결혼을 하면 보통 남자가 살집을 구하고 그 집에 들어갈 가전제품이나 생활용품을 여자가 채우게 되니  아무래도 비용이 결혼비용이 딸 시집보낼때보다는 아들 장가보낼 때 많이 들거라는 얘깁니다. 남한에 입국해 낳은 귀염둥이 막내는 잘 크고 있는지?

이기숙: 원래 공부잘한다고 했는데…초등학교 때는 전교 1등도 하고 학급에서 1등은 놓치지 않았는데 중학교 올라가서 학원을 잘못 보내서 공부하는데 흥미를 잃어서 지금 공부를 안해서 죽겠어요.

10년 세월을 훌쩍 넘기면서 이제는 탈북자가 아닌 그냥 남한주민으로 가족의 행복을 소중하게 생각하며 작은 소망을 가져봅니다.

이기숙: 이제는 남과같이 우리 아들 결혼 시키고 막내 대학입학 하는 것까지 뒷바라지 하고 아이들  결혼하면 남편 좋아하는 낚시도 함께 가고 여행도 가고 그러면서 살아야죠.

제2의 고향 오늘은 무산출신으로 현재 라면 생산공장에서 일하는 이기숙 씨의 이야기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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