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남한사람이 된 것같다

워싱턴-이진서 leej@rfa.org
2019-08-20
이메일
댓글
Share
인쇄
탈북민이 만든 냉면.
탈북민이 만든 냉면.
Photo: RFA

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누구나 새로운 환경에 처하면 적응 기간이 필요합니다. 탈북자분들이 남한에 가서 정착하기까지는 보통 3년정도의 시간이 필요한다고들 하는데요. 그 기간은 어떤 마음으로 생활하는지에 따라 다른 것 같습니다. 오늘은 남한생활 6년차 이성희(가명)씨의 이야기 입니다.

이성희: 죽느니 차라리 가는 것이 낫겠다 해서 애를 데리고 탈북을 감행했죠.

의미 심장하게 말하는 이씨는 이렇게2013년 도강을 합니다. 그런데 그 탈북이유가 남달랐습니다.

이성희: 탈북은 배가 고파서 온 것도 살기 싫어서 온 것도 아니고 신앙 때문에…사사여행으로 중국에 왔다가 미국 선교사님을 만났어요. 그리고 그 사실이 북한에서 발각될까봐 두려워서 집에 갔다가 다시 탈출을 했어요.

기독교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을 친척이 알았는데 당국에 신고를 한다고 해서 무서웠다는 말입니다. 이 씨가 대대로 기독교 신앙을 갖었던 집안사람도 아니고 잠시 중국에 갔다가 아주 우연히 알게된 기독교 때문에 일이 그렇게 커질줄 몰랐던 거죠.

이성희: 제가 친척방문으로 중국에 왔다가 이모가 식당을 하는데 거기서 선교사님을 만났어요. 선교사님들이 전도를 하고 힘든 사람도 돕고 하는데 저도 얘기를 들었는데 공감이 되더라고요. 선교사님이 성경을 읽어보라고 해서 보니까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을 믿고 싶더라고요. 그리고는  저도 모르게 빠져든 것이죠.

기자: 말을 들어보니 공감되는 이야기가 많았다고 했는데 어떤 이야기가 마음을 움직였나요?

이성희: 성경에 내 마음같이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고 어쨌든 너를 젖과 꿀이 흐르는 세상으로 인도할 것이다 이런 좋은 말씀이 성경책에 많더라고요. 그리고 사소한 것부터 실현이 되더라고요. 그때 순수한 마음에서 믿게 되더라고요.

기자: 그렇게 순간적으로 사람이 변할 수가 있습니까?

이성희: 제가 학교 졸업할 때인 90년대 말까지만 해도 저희 부모님도 노동당원이지만 정말 당에서 하라는데로 하고 철썩같이 믿고 살았어요. 그런데 고난의 행군이 오고 배급이 끊기고 시장경제가 활성화 되고 하니까 오직 내가 돈벌지 않으면 못살겠구나 하는 세상이 됐어요. 눈만 뜨면 오늘은 어떻게 뭘해서 먹고 살까 하는 생각만 하다보니까 돈을 써서 비자를 내서 여권을 내가지고 나왔지만 나와 본 현실은 내가 갈망하던 세상이더라고요. 풍요로운 세상이고 어딜 가도 쌀과 과일이 넘처나고 이런 곳에서 자식을 키워보고 싶고 나도 이런 땅에서 살아보고 싶다.

북한에서 태어나 36년을 살다가 한순간 생각이 돌변하게 된 사건이었습니다. 그냥 말만 들었다면 믿지 않았겠지만 중국에서 미국 국적의 한국말을 하는 동포 선교사를 만나 들었던 말은 이 씨를 새로운  세계로 인도하기에 충분했던 겁니다.

그리고 중국 친척방문의 비자 기간이 만료돼서 북한으로 돌아갔는데요. 마음이 항상 불안했습니다. 게다가 친척이 신고까지 한다고 하니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이성희: 중국에서는 탈북생각을 전혀 안했는데 보위부에서 기독교인은 죽인다 알고나니까 공포에 질려서 하루도 살수 없더라고요. 잡혀서 고생을 하느니 가는게 낫겠다 생각했죠…아무리 중국이 아직 민주주의 나라는 아니지만 북한보다는 훨씬 자유롭잖아요. 와보니까 이 세상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고 한 번 외부세상을 보니까 북한에서는 살 수가 없더라고요.

중국방문 후 북한으로 돌아가서는 바로 아이를 데리고 탈북을 했습니다. 그리고 중국에서도 오래 있지는 않았습니다.

이성희: 나는 북한에서 살 수 없는 사람이다 생각이 드니까 무조건 이모가 반대를 해도 남한에 가야지 하는 생각이었어요. 이모집에서 계속 한국 드라마만 봤어요. 이모가 한국에 대해 얘기도 안해서 처음엔  한국이 어딘지를 몰랐어요. 이모 친구들은 우리말을 하는데 섬나라다 했는데 어딘지는 몰랐죠. 남조선이나 아랫동네라고 했다면 애초에 갈 생각을 안했겠죠. 지도 사다놓고 한국을 찾았어요. 탈북자를  만나서 탈북에 대한 말도 들을 수 없고 저는 평양 쪽에 살아서 탈북이란 말도 그때는 몰랐어요. 그러다  나중에 어느 목사님을 만나서 브로커를 사서 목사님이 비용을 대주셔서 아이랑 왔거든요.

탈북의 이유도 그렇지만 남한에 간 사연은 솔직히 좀 황당하게 들리기까지 한데요. 남한 즉 북한에서 말하는 남조선을 찾았을 때는 어떤 심정이었는지도 들어보시죠.

이성희: 한국 와보니까 처음부터 장단점이 같이다 밀려왔어요. 외로움, 두려움 또 아이를 혼자 키우면서 어떻게 살까 하는 이런 걱정 또 한편으로는 내가 노력하는만큼 손에 돈이 쥐어지고 내가 하고 싶은데로  북한에 있는 부모님, 형제들에게 돈도 보내고 이런 것에 위안을 삼고 살았죠. 한동안은 우을증도 오고 했는데 내가 이렇게 쓰러지면 엄마 아빠도 못볼 것이고 그런 생각도 나고 해서 일어나야지 하면서 교회에 나가면서 많이 마음이 의지됐고 그렇게 살았던 것 같아요.

기자: 어느 정도가 지나서 안정이 되던가요?

이성희: 한 6개월 정도요. 처음에는 너무 몰라서 마트에 가서 물건 사고는 싸인하세요. 이런 말도 무슨말인가 하고 가만히 서있고 했어요. 나는 중국에서 살다가 온 것이 아니라 이모집에서 한두달 가만히 있다가 와서 중국에서 살다온 친구와는 또 달랐어요. 너무 생소하고 모든 것이 꿈속에서 본 세상과 같아서 한편으로는 너무 좋고 다른 한편으로는 너무 두렵고 한 속에서 6개월 정도를 보냈어요. 그리고 집에 돈을 보내고 소식이 오고 북한에 있는 가족이 다 잘있다는 것을 알고는 나도 힘을 내서 만날때까지 살아야지….

이제 남한생활이 6년이 됩니다. 그동안 아이를 키우면서 회사생활도 했고요. 생산직 단순노동일도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냉면집 사장님이 돼서 자기 가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여름이라 그런지 냉면을  먹으러 찾아오는 손님이 꽤 된다고 하는데요. 경제적으로 큰 부담없이 노후 생활을 대비하면서 생활하는데 마음 한편 북한에 있는 가족에 대한 걱정은 어쩔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성희: 지금은 너무 잘 적응을 해서 내 자신을 칭찬을 해요. 너무 고생했어라고요. 지금은 내가 북한 사람이란 느낌이 없어요. 너무 익숙해졌어요. 내가 여기서 태어난 것처럼 적응이 잘돼서요. 그런데 아직 사라지지 않은 것은 잠을 자다가 꿈을 꾸면 계속 북한인거예요. 쫓기우고 누가 나를 잡으러 오고 해서 속상해요.

제2의 고향 오늘은 오늘은 이성희(가명)씨의 이야기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

원본 사이트 보기